(여용주 목사의 역사탐방)브라질 개신교회 역사 11
2022/04/08 10:40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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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용주 목사(봉헤치로 제일교회 담임)

 

다시 유럽으로

 앙리빌에서 인디오 선교에 힘쓰던 어느 날, 과나바라 만에 프랑스 선박인 자크(Jacques) 호가 정박하였습니다. 이 배는 빌가뇽과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총독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과나바라 만에 정박하는 것을 막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를 수상쩍게 여긴 선장 마르탱 부둥(Martin Boudoun)은 오히려 더욱 상륙에 힘써, 결국 과나바라 만에 배를 댈 수 있었습니다. 그의 우선 목표 역시 무역이었기 때문에, 그는 선원들과 함께 앙리빌에 들어와 인디오들과 교역하여 아메리카 특산품 여러 개를 배에 실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그곳에 살고 있던 개신교인들의 살뜰한 도움을 받으며 그들과 친분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신뢰하게 된 선장은, 선원들이 교역품과 보급품을 배에 싣는 것을 마치자 앙리빌의 개신교인들에게, 그들 중 혹시 유럽으로 가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의 배에 열 명 정도 탈 수 있는 자리가 있으니 함께 가자고 하였습니다. 이에 식민지 치리회는 회의를 열고, 리시에르 목사와 뒤 퐁 경을 포함한 열 다섯 명이 유럽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여행 준비를 마친 그들은 1558년 1월 4일, 자크 호에 승선하여 과나바라 만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항해를 시작한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아, 자크 호 바닥에서 물이 새기 시작하였습니다. 자크 호는 선체가 낡은 배였던 것입니다. 그 어떤 방법으로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자, 선장은 많이 미안해하면서, 네다섯 명 정도가 배에서 내리면 문제가 좀더 수월해질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제안하였습니다. 그러자 여섯 명이 이 제안에 응하여, 선장이 내려준 작은 구명보트에 탔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명은 나머지 다섯 명의 끈질긴 설득으로 다시 자크 호로 돌아갔는데, 그가 바로 신학생 장 드 레리(Jean de Léry)로, 그는 제네바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아메리카라고도 불리는 땅 브라질로의 여행” 이라는 책을 써서 1578년에 바젤에서 출판하였습니다. 그가 자크 호로 돌아가 무사히 제네바로 귀환한 덕분에 그 때 일어난 일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남게 되었고, 오늘날의 우리도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다섯 명의 순교자들 

 작은 보트를 타고 다시 과나바라 만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모두 다섯 명으로, 피에르 부르동(Pierre Bourdon), 장 뒤 부르델(Jean du Bourdel), 마티외 뵈르네일(Matthieu Verneuil), 앙드레 라-퐁(André la-Fon), 그리고 자크 르 발뢰르(Jacques le Balleur)였습니다. 그들이 상륙하여 앙리빌에 들아가자 마자, 개인적인 용무로 그곳에 있던 빌가뇽과 마주쳤습니다. 빌가뇽은 곧 그들을 체포하라고 명령하였는데, 피에르 부르동과 장 뒤 부르델, 마티외 뵈르네일과 앙드레 라-퐁은 잡혔으나, 자크 르 발뢰르는 썽 비쎙치로 도망쳤습니다. 

 빌가뇽은 1월 16일에 이들 넷을 콜리니 요새의 감옥으로 옮기고 심문하였는데, 이 때 그는 그들에게 서면으로 답변을 작성할 것을 허락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오직 12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신대륙 최초 신앙고백서인 “과나바라 신앙고백서” 또는 “플루미넹시 신앙고백서” 입니다. 이 신앙고백서를 받아본 빌가뇽은 대노하여, 2월 9일에 이들 모두를 교수형에 처했습니다. 썽 비쎙치로 탈출했던 자크 르 발뢰르는 2년 후 포르투갈인들에 의해 체포되었고, 1568년에 예수회 신부 죠세 지 언시에따(José de Anchieta)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이 다섯 명은 신대륙 최초 개신교 순교자들로 기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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