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용주 목사(봉헤치로 제일교회 담임)
빌가뇽의 변심
프랑스령 남미 식민지에서 장 코앙타크가 일으킨 성찬논쟁이 계속되자, 총독 빌가뇽과 두 목사들 및 치리회는 1557년 4월 1일자 배편으로 프랑스로 떠나는 니콜라 카르모 편으로 칼빈에게 보내는 서한 두 통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답장이 더디 오자, 총독 빌가뇽은 6월 4일, 목사 중 한 명인 샤르티에르를 제네바에 직접 보내어 논쟁에 대한 최종적 답변을 가져오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물론 이것은 식민지에 단 한 명의 목사만을 남겨놓으려는 책략이었습니다. 그래야 자기가 신학적으로 수세에 몰리지 않을 것이니까요.
그렇게 논쟁은 일단 수그러드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강림 기념주일 예배 때, 리시에르 목사가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의 순수한 세례와 이에 첨가된 요소들의 비합리성에 대한 설교를 하던 중, 총독 빌가뇽의 낯빛이 점점 심각하게 바뀌어 갔습니다. 그는 설교 도중에 끼어들어, 온 회중 앞에서 “세례식에 여러 요소를 첨가한 고대와 중세 교사들은 당신보다 훨씬 훌륭한 분들이오!” 라고 소리치고는, 땅을 박차면서 예배당을 나가버렸습니다.
이날 빌가뇽은 모든 식민지 주민들에게 두 가지를 공포했습니다. 첫째, 칼빈에 대한 자기 의견이 바뀌었는데, 이유는 그가 기독교 안에 천년 넘게 내려온 신앙의 요소들을 거부하고 새로운 교리를 가르치는 이단이라는 것, 그리고 둘째, 그렇기 때문에 샤르티에르의 귀환을 기다리지 않고, 이제부터는 자기가 이해하기에 타당한 대로의 목회방침을 하달하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두 목사들이 칼빈에게 보낸 보고서의 문장, “빌가뇽 총독은 옛 교사들에 대한 큰 애정을 품고 있습니다” 가 사실임이 드러났습니다. 또한, 빌가뇽은 처음부터 개신교와 로마 카톨릭을 정치적으로 바라보면서, 자신의 이익에 따라 이 둘을 저울질하고 있었음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그가 프랑스에서 개신교인들에 대한 핍박이 날마다 거세어지고 있다는 소식 대신, 갈수록 굳건한 사회적 세력을 구축해가고 있었다는 소식을 접했다면(그가 브라질에 올 때의 상황과 같이), 과연 그가 이런 행동을 취했을지 의문입니다.
내륙으로 이주, 그리고 선교
이 때부터 총독 빌가뇽은 세리지뻬 섬의 콜리니 요새 내의 개신교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자신의 측근들이 개신교 신앙을 가지게 되자, 그들을 감옥에 가두고 로마 카톨릭으로 돌아오라며 고문하였고, 프랑스에서 온 개신교 이민자들에게는 사분의 일 인분 양의 음식만 주고 하루 종일 노역을 시켰습니다.
그렇게 인내함으로 힘겹게 4개월을 견디던 개신교인들은 그해 10월 총회를 열고, 빌가뇽을 더 이상 회중의 총독으로 인정할 수 없으니 자기들이 요새를 떠나겠다고 통보하였습니다. 그러자 빌가뇽은 의외로 그들의 요구조건을 들어주어, 10월 말 그들을 요새 밖으로 내보내 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약 2백명의 개신교인들이 식민지 내륙의 앙리빌로 거주지를 옮겼습니다.
그런데 그곳은 포르투갈과 적대적인 뚜삐남바 족의 영토여서, 이들이 거의 매일 찾아오던 곳이었습니다. 그때 거기서 개신교인들과 인디오들의 본격적인 접촉이 시작되었습니다. 개신교인들은 소년들과 청년들을 자주 인디오 마을로 보내어 그들과 함께 언어를 습득하도록 하였고, 그들을 자신들의 식사에 초대하기도 하며 친분을 쌓았습니다. 물론 그것은 선교가 목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