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용주 목사(봉헤치로 제일교회 담임)
샤스타: 구원, 그 이후
나니아의 남쪽에 ‘칼로르멘’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그곳은 사막이 넓게 펼쳐져 있는 더운 나라로, 사람들의 피부색은 까무잡잡했으며 머리에는 터번을 쓰고 다녔다. 그 칼로르멘 제국의 머나먼 남쪽 한 어촌마을에 ‘샤스타’라는 아이가 살고 있었다. 그는 ‘아르셰슈’라는 어부의 아들인데, 친아들이 아니라 주워 온 아이였다. 그는 금발에 흰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북쪽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늘 북쪽을 향해 있었다. 마을 주변이나 남쪽에 대한 것에는 관심이 조금도 없었다. 그러나 “주변에 그곳에 가본 사람이 아무도 없는 데다, 아버지가 혼자서는 절대로 가지 못하게” 했다.
이러한 아르셰슈의 태도는 어린 샤스타가 보기에도 비이성적이었던 것 같다. 샤스타는 오히려, “[북쪽] 언덕 너머에 아버지가 숨기고 싶어하는 어떤 즐거운 비밀이 꼭 있을 것만 같았다.” 왜냐하면 “그는 북쪽에 아무 관심도 없었을 뿐더러 매사에 아주 타산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일에 합리적으로 처신하는 사람이 무엇인가를 강력하게 반대하거나 금지한다면, 거기에는 무엇인가를 숨기려는 것이 있다는 것을 샤스타는 알고 있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그가 관심을 두지 않아서 잘 모르기 때문인데, 자기가 모른다는 사실을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다. 또 하나는 ‘매사에 아주 타산적’일 정도로 발달된 이성적 사고로도 파악되지 않기 때문인데, 세상에 자기 이성적 사고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 싫어서다.
사실, 샤스타의 일상은 행복하지 않았다. 그는 가혹한 아르셰슈 밑에서 노예처럼 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러한 일상에서 자유롭고 싶어했다. 그런 그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왔다. 그를 노예로 사고 싶어하는 타르칸, 즉 귀족이 자기 집을 방문한 것이었다. 그런데 일생일대의 기회는 그것이 아니었다. 바로 타르칸이 타고 온 말이었다. 자신의 삶을 푸념하던 샤스타는 그 말을 보며, “네가 말을 할 줄 알면 좋겠다, 친구야” 라고 말했는데, 그 순간 그 말이 “나지막하지만 아주 또렷하게”, “나 말 할 줄 알아” 하고 속삭여왔기 때문이다.
까무러치게 놀란 샤스타는 그 말과 대화를 시작했다. 그 말은 사실 나니아에서 태어난 말하는 말이었다. “나니아, 행복의 나라 나니아! 히스로 뒤덮인 산과 백리향 나는 초원, 수많은 강과 물이 넘치는 골짜기, 이끼 낀 동굴, 그리고 깊은 숲 속에서는 난쟁이들의 망치소리가 울려 퍼지는 나라, 나니아. 아, 공기는 또 얼마나 맑은지! 거기서의 한 시간은 칼로르멘의 천 년 세월보다 더 좋아.” (『나니아 연대기』 제 3권 「말과 그 소년」 20쪽)
그는 어렸을 때 납치당해서 칼로르멘에 오게 되었다고 했다. “나는 엄마 말을 안 들은 대가를 톡톡히 치른 거야. 인간들 밑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동안, 나는 내 천성을 숨긴 채 다른 말들처럼 말도 하지 않고 멍청한 척했거든.”
이 말의 이름은 ‘브리’였다. 그는 항상 도망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비록 지금 당장은 타르켄의 억압받는 군마로 지내고 있지만, 언제든지 자유를 행하여 탈출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샤스타가 그의 이 생각에 동조했다. 그도 도망치고 싶었던 것이다. 이 때, 브리가 말했다.
“너, 나랑 같이 안 갈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