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용주 목사의 문화탐방)나니아 연대기: 구원 그 이후 11
2024/02/23 22:06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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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용주 목사(봉헤치로 제일교회 담임)

 

 아슬란(9): 경외와 사랑, 자유와 긍지

 아슬란을 경외한다는 것은 그를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에 따라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바쳤을 때, 그는 하나님이 무서워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해서 순종했던 것이었다. 즉, ‘경외’란 하나님께 대한 독특하고 지극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하여 성경 저자들이 찾은 단어인 것이다. 

 우리도 누군가를 참으로 사랑하면 그 사람이 싫어하는 것을 안 하려고 노력하고,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하려고 노력하지 않는가? 사람 사이의 사랑도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포함하는데, 자신을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심지어는 피붙이나 자기 자신보다도 더 사랑하기를 요구하시는 하나님께 대해서는 더욱 그렇지 않을까? (마 10:37-38 참조) 그러므로 ‘두려움’, 즉 경외와 사랑은 한 현상의 두 가지 측면인 것이다. 

 이것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푼 마지막 설교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 여호와께서 오직 네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의 후손인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으니라(신 10:12-15).” 

 사랑, 이것이야말로 기독교와 다른 종교를 구분 짓는 기준이다. 온 우주를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 사람과의 관계에 구애 받을 필요가 없으신 그 분이 스스로 우리와 언약으로 매이셨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리고, 자기를 이토록 기뻐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택함 받았다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은 그 사실에 대한 무한한 긍지가 그의 마음속을 가득 채운다. 『나니아 연대기』 제 6권 「은의자」에 등장하는 퍼들글럼이 좋은 예다. 아슬란과 나니아가 단지 그의 상상일 뿐이며 도무지 실제로 존재할 수 없다고 설득하는 녹색 마녀에게 대항하여,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럼에도 나는 이 ‘가짜’ 세상을 지지할 것이오. 아슬란이 존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나는 아슬란의 편이오. 나니아가 존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나는 가능한한 나니아 사람으로 살아갈 것이오!” 

 이 긍지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이 자기에게 허락하는 자유로운 상태에 대한 긍지이기도 하다. 제 3권 「은의자」에 나오는 군마 브리의 말도 들어보자. “나니아의 전쟁에 자유로운 말로 우리 국민과 함께 나간다면 한 판 멋지게 싸울 텐데. 그런 전쟁이야 말로 이야기할 가치가 있는 거야.” 제 7권 「은의자」에 나오는 늙은 곰도 있다. 원숭이 시프트가 도로와 대도시가 넘쳐나는 나니아를 약속할 때, 그는 “그런 것들은 다 필요 없소. 우리는 단지 자유롭게 살고 싶소.” 

 그러므로 아슬란에 대한 경외와 사랑, 자유와 긍지가 하나인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시간과 상황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더욱 깊어지고 굳건해지고 풍성해진다. 물론 이 과정에는 수많은 시련이 있다. 하지만 바로 이 ‘과정’을 통하여 역사하는 아슬란에 대한 신뢰가 쌓인다. 마치 씨앗이 발아하여 풍성한 열매를 맺기까지, 그리고 그 열매가 무르익을 때까지, 따가운 햇빛과 차가운 비와 눈, 그리고 거세게 부는 바람이 있는 시간과 상황이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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