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문학 산책)위대한 저술가 암브로시우스 밀라노 감독
2020/12/04 21:27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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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광 목사(World Share USA) 
 
주후 390년 데살로니가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로마의 통치를 반대하고 독립을 얻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폭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데오도시우스 황제의 장군 가운데 한 사람이 성난 폭도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성난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군인들에게 보복을 명령했고 로마 군인들은 데살로니가의 무고한 시민 7,000명을 학살하며 폭동을 진압했습니다.
 그 뒤에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밀라노로 돌아왔습니다. 주일에 황제는 예배드리려 성전에 왔습니다. 밀라노 암브로시우스(Ambrosius, 339-397) 주교가 성전 문을 막고 못 들어가게 했습니다. 황제가 물었습니다. “왜 못 들어갑니까?” 암브로시우스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황제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무고한 시민을 학살하셨는데 무슨 염치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만나려고 하십니까? 못 들어갑니다.”
 그러자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다윗 왕도 죄를 지었잖소?”하며 물러서지 않습니다. 암브로시우스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감히 황제가 다윗 왕을 흉내 내려고 하십니까? 그렇다면 황제께서는 다윗의 회개를 흉내 내세요. 다윗 왕처럼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전에 올라갈 수 없습니다.” 결국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성전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암브로시우스의 말을 달게 여기고 자기의 잘못을 뉘우친 8개월 후에 황제의 옷을 벗고 교회 앞에서 공개적으로 참회를 했고 그 해 성탄절에 비로소 교회의 사면을 얻고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암브로시우스는 340년 경 독일 트리어에서 태어납니다. 그의 아버지는 갈리아 지방 총독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납니다. 이에 가족들은 로마로 갑니다. 로마에서 암브로시우스는 철학과 수사학을 배웁니다. 그 외에도 많은 학문들을 배우고 인문학의 대가가 됩니다.
 암브로시우스 뒤에는 아버지의 친구 안치오 프로부스가 있습니다. 그는 로마 황제의 근위 대장이었습니다. 독실한 기독교인 안치오 프로부스로 인해 암브로시우스에게 기독교 신앙과 기독교 사상을 가르칩니다. 이것은 그가 갑자기 신자에서 주교로 추대 받아 성공적으로 목회했던 이유입니다.
 암브로시우는 결단력과 명석함으로 젊어서부터 성공적인 변호사로 살게 했습니다. 그의 이런 경험은 후일에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기독교적 경제관과 금욕적인 생활, 이단에 대항하는 논리적 치밀함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서른두 살에 그는 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1세에 의해 밀라노에 관저를 둔 에밀리아 리구리안 지방의 총독이 됩니다.
 당시 밀라노 교회는 심각한 대립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밀라노 주교 아욱센티우스가 죽자 후임자 선출을 두고 아리우스파와 정통교회가 싸웠습니다. 큰 대립이 일어났습니다. 정통 교인들이 자신들의 지도자를 꼭 세우려 하고 아리우스파도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큰 소란이 일어납니다.
 암브로시우스 총독은 갈등 중재를 위해 교회에서 연설을 했습니다. 그의 연설에 많은 사람들은 감동을 받습니다. 그때 한 아이가 ‘암브로시우스 주교!’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양쪽 사람들 모두 ‘암브로시우스 주교!’라고 외쳤습니다. 암브로시우스는 사양했지만 사람들은 굽히지 않았습니다.
 강직한 암브로시우스는 주교가 되어달라는 교인들의 청을 완강히 거부합니다. 아직 학습 교인이고 총독의 자리를 황제의 허락 없이 내려놓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밀라노 교인들은 계속 강청합니다. 로마 황제 발렌티안 1세에게 사람들을 보내 밀라노 감독이 되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암브로시우스를 신임했던 황제는 크게 기뻐하고 환영합니다.
 아마도 로마교회와 더불어 중요한 밀라노 교회를 자신이 신임하는 신하가 감독한다는 것이 황제에게 큰 득이 될 것으로 보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부르심을 직감하고 그는 곧 세례를 받고 374년 12월 7일에 밀라노 주교가 됩니다. 주교가 된 그는 가장 먼저 밀라노 교구의 심플리키아누스 감독의 지도를 받아 성경을 배웁니다. 성경을 향한 그의 열심을 엿볼수 있는 장면입니다. 후일 심플리키아누스는 암브로시우스의 후계자로 밀라노 교회의 주교가 됩니다. 다행히 암브로시우스는 헬라어에 능통해서 필론과 오리겐 성경 주석을 통해 성경을 배웠고, 목회를 배웁니다. 
 암브로시우스는 감독이 된 후 기독교 교회사에 남을 중요한 일을 몇 가지 실천했습니다. 첫째는 금욕적인 생활이었습니다. 거의 국가 종교가 된 기독교는 점차 권력과 결탁하고 세속적으로 변질되어 갔습니다. 이에 반동으로 많은 사람들은 사막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고, 수도사가 되어 금욕생활을 합니다. 암브로시우스는 수도사처럼 금욕 생활을 했답니다. 금식을 자주 했으며, 포도주는 마시지 않았고 교인들에게도 금주를 권했습니다.
 둘째는 성경 연구였습니다. 어거스틴의 참회록에 의하면 암브로시우스는 ‘항상’ 바쁘고 분주한 것처럼 보였고, 성경과 다른 책들을 많이 읽었다고 합니다. 성경공부와 독서는 암브로시우스의 영성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셋째는 열정의 목양입니다. 법률가와 정치인으로 살았던 암브로시우스는 목회를 시작하자마자 목회에 집중합니다. 교인들을 상담하고 지도하는데 많은 시간을 쏟았습니다. 특별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대한 관심은 지대했습니다. 그의 저작들의 많은 부분이 가난한 자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아리우스파와의 논쟁이었습니다. 당시 서방교회에서는 예수의 신성을 부정했던 아리우스파가 끼치는 악하고 나쁜 영향력 가운데 이 있었습니다. 정통 신학을 따랐던 암브로시우스는 탁월한 저술활동과 정치적인 힘을 발휘해서 아리우스파를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에서 이단으로 정죄하기에 이릅니다.
 화려한 변호사로 정치인으로 살던 암브로시우스는 갑자기 안수를 받고 주교로 일했지만 충실한 믿음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일생 동안 가난하게 살았고, 제국의 권력자들에게 굴하지 않는 용맹함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뜨겁게 한 시대를 살다 397년 주님의 품에 안깁니다. 그가 남긴 걸출한 작품들은 귀한 신앙의 유산으로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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