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초 이야기)허물진 속내
2019/07/11 09:30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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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송자
 
계절의 한복판에 이르러서야 단비가 내린다. 지루한 가뭄 끝으로 찾아와서 때아닌 장맛비처럼 여러 날을 퍼부었다. 드디어 남반부의 겨울이 제대로 자리를 잡아가는지 실내에서도 손끝이 알싸하다. 예배당 길목 나무 아래서 목발을 의지하고 있는 소년이 “행복한 주일 되기 바란다”며 손을 흔든다. 그는 주차된 차들을 지켜주고 얼마 되지 않는 수고비를 받는다. 한쪽 다리가 보이지 않는 바지 끝자락에 운동화가 달랑거린다.

 두꺼운 옷을 입은 사람들이 부지런히 교회로 들어간다. 숲속의 작은 예배당의 통나무창문들이 꽁꽁 닫혔다. “날씨가 춥습니다!” 오늘의 인사말처럼 마주하는 사람마다 손을 비비며 춥단다. 세기를 건너온 나무 의자의 서늘함이 낯설다. 조금 전 만난 소년의 얇은 옷자락이 스쳐 간다. 조그만 불편도 감내 하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이 머쓱해진다. 잔잔히 울려 퍼지는 성가의 간절함 사이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이의 음성을 듣는다.

 불의의 사고로 실명한 형제의 찬양 가사 한 절 한 절이 깊은 감동과 은혜로 내 영혼을 출렁인다. 육신의 눈은 보이지 않지만, 영혼의 눈을 뜨고 주님을 바라보고 있는 듯 절절한 사랑을 고백하고 있다. 흔들림이 없는 그의 당당한 모습에서 광채가 난다. 불이 옮겨붙은 알코올 병이 얼굴을 덮치던 날, 쥐고 있던 모든 것을 속절없이 내려놓아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누구도 감히 측은히 여기지 못할 경지, 하나님의 성산에서 우뚝 서 있다.

 정금같이 나오게 하시는 은총을 덧입고 하나님의 예배자로 빛을 발하고 있는 그의 삶 자체가 복음이고 선교다! 절망의 깊은 수렁에서 얼마나 많은 정죄의 돌을 맞았을까… 가혹하고 엄중한 시련을 겪는 동안 세상은 마음대로 수군거리고 조롱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주님의 깊은 곳으로 가는 걸음을 막진 못했다. 기어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깃발처럼 펄럭이는 제도와 규범을 부끄럽게 하는 임 재와 연합의 실체를 보여주고 있다.

 속박에 익숙해진 영혼의 굴레와 멍에를 벗어버리고, 참 자유의 공명을 울리며 잊어버린 영원한 기쁨을 회복한 모습이다. 참으로 신앙의 길은 끝까지 가보아야 할 일이다. 그 자리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일을 만나고 주저앉고 싶은 날도 많았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다시 일어서게 하였던 한마디, “죽지 않으면 된다!”라고 수없이 외쳤을지도 모른다. 살아간다는 것은 정답이 없는 숙제처럼 때론 막막하기도 하지만, 살아가느라 보면 새날은 온다.

 비록 가시적 세상은 보이지 않아도 천상을 바라보며 구원의 은총을 감사하는 저가 산 증인이다. 힘겨운 날갯짓으로 인고의 세월을 건너온 성숙한 영혼의 노래가 계곡의 물소리처럼 맑고 청아하다. 기온이 떨어져 통증이 날카로워졌다며 불평하려 드는 심사를 슬그머니 내려놓는다. 몸이 기억하고 있는 잘못된 습관이다. 편리함에 익숙해진 육신의 연약한 속성은 신앙도 삶도 감내하지 않으려고 한다.

 며칠 전부터 몸이 이상증세를 보였다. 다리가 아픈 것인지 허리가 아픈 것인지 분별이 되지 않았고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라 설명도 할 수 없었다. 큰일은 아닌 듯하였지만,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다 보니 건강하게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게 되었다. 언제 적에 몸살이란 것을 앓아보았는지 기억에도 없다. 그동안 평안하게 살게 해주셨음을 감사드리다가 나도 모르게 웃었다. “무슨 감사가 그렇게 인색한지?” 물어보시는 듯해서다.

 넘치도록 가지고도 없는 것을 불평하고, 주신 것을 모두 누리지도 못하며 더 달라고 부르짖으며 살았을 것이다. 살아있음을, 생명 주심을 감사하고, 동행하심을 감사하고…… 모든 것이 은혜라며 부르짖던 무수한 감사들이 입술에 매달린 언어들이었을까? “배은망덕”이란 단어가 목구멍에 걸려 뜨끔거린다. 기적중의 기적,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구원의 은총을 누리면서도“거룩한 속물처럼” 여전히 타협에 익숙한 허물진 속내를 들여다본다.

 오늘도“주님 없이 살 수 없음”을 고백하며 예배당을 나선다. 대서양을 건너온 낡은 종탑 아래서 마따라조 백작의 대나무 숲을 바라본다. 주님을 사랑하고 찬양할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 아무것도 드릴 것 없는 사람이 무엇으로 주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을까! 마디마디 옹이 진 삶이어도 절개를 굽히지 않는 대나무처럼 올곧은 믿음으로 주만 바라며 따르고 싶다. 흔들리면서도 부러지지 않는 유연함으로 영원을 노래하는 예배자로 말이다.

 저만치 나무 아래 소년이 휘청거리며 자리를 떠나는 모습이 보인다. 뒤따라가서 부를까 망설이다가 멀어져 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싸늘한 바람을 등에 지고 몸에 일부가 된 듯한 목발을 뚜벅뚜벅 내디딘다. 허허로운 들판을 가로지르는 주님의 외로움이 흐릿한 눈시울에 걸린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차를 돌려 만난 소년의 손에 헐렁한 빵 봉지가 들려있다. 환한 미소로 일용할 양식을 흔들어 보이며 감사와 축복을 아끼지 않는다!

 지폐를 만지작거리던 주머니 속 손이 알량하고 인색한 감사처럼 민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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