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수 목사(익산봉곡교회 담임)
우리의 삶의 현장에는 변질된 것들이 생긴다. 변질은 본질이 바뀐 것을 의미한다. 변질된 것은 못쓰게 되는 것이다. 나쁜 곰팡이 균은 어떤 물건을 변질시켜서 썩게 하여 못쓰게 한다. 배추가 발효하면 김치가 되지만, 변질되면 썩고 만다. 콩도 발효되면 유익한 메주가 되지만 변질되면 썩어 못쓰게 되는 것이다. 발효는 변화요, 변질은 썩는 것이다. 사람이 변화되면 사랑과 화평의 사람이 되지만 변질되면 이웃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인류의 조상 아담의 변질은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가룟 유다는 변질되어 예수님을 팔아버리는 변절자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다윗은 허물이 있었지만 변화되어 축복의 인생을 살았지만 사울은 축복을 받았음에도 변질된 인생을 살다가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말았다.
대하 26:16에 보면 웃시야를 펑가하고 있다.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였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웃시야가 바로 변질된 자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웃시야는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고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구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강성하게 된 웃시야는 그만 교만하게 되었고 악을 행함으로 급기야는 문둥병이라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노년을 불행하게 보내다 삶을 마감하고 말았다. 약하고 어려웠을 때는 겸손하게 하나님을 잘 경외하던 그가 강성해지니 그만 교만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웃시야의 모습을 통해서 약할 때보다 강성할 때가 더 신앙의 위기임을 깨닫게 된다. 사람은 강성할 때 변질되기 쉽다는 의미다. 따라서 웃시야가 교만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였기 때문이다. 죄의 근본은 하나님을 망각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웃시야가 하나님을 망각했다는 것은 형통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것이다. 자신을 선민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시고 때를 따라 놀라우신 기적으로 자신을 도우신 은혜를 잊어버린 것이다. 자신의 힘으로 된 줄로 착각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교만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곧 그것은 형통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가르쳤던 스가랴가 죽었기 때문이다. 영적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스가랴가 사라지자 웃시야는 교만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분향을 하게 된 것이다. 말씀을 벗어난 행동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교만함으로 말씀을 무시하고 분향을 하다가 웃시야는 문둥병자가 되었고 하나님의 전에서 쫓겨나 별궁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던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 문둥병환자로 살게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웃시야를 통해 깨닫게 된다.
계속해서 겸손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인생의 본분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겸손을 저버리고 변질되어 교만하면 결국은 패망의 인생으로 전락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이 되어도 결단코 변질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변질된다. 사울이 그랬고 솔로몬이 그랬고 역대 유다의 왕들이 거의 대부분 변질이 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성도인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잘 나갈 때 변질이 된다는 사실이다. 직분이 올라가면 지위가 높아지면 생활이 나아지면 언제 그랬었는가라고 목에 힘을 주고 교만한 모습으로 변질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 누구도 예외가 없다. 개구리가 올챙이 적을 기억하지 못하는 격이다. 그러므로 신앙이, 인격이 변질되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자.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항상 은혜를 사모하자.
박철수 목사(익산봉곡교회 담임)
우리의 삶의 현장에는 변질된 것들이 생긴다. 변질은 본질이 바뀐 것을 의미한다. 변질된 것은 못쓰게 되는 것이다. 나쁜 곰팡이 균은 어떤 물건을 변질시켜서 썩게 하여 못쓰게 한다. 배추가 발효하면 김치가 되지만, 변질되면 썩고 만다. 콩도 발효되면 유익한 메주가 되지만 변질되면 썩어 못쓰게 되는 것이다. 발효는 변화요, 변질은 썩는 것이다. 사람이 변화되면 사랑과 화평의 사람이 되지만 변질되면 이웃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인류의 조상 아담의 변질은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가룟 유다는 변질되어 예수님을 팔아버리는 변절자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다윗은 허물이 있었지만 변화되어 축복의 인생을 살았지만 사울은 축복을 받았음에도 변질된 인생을 살다가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말았다.
대하 26:16에 보면 웃시야를 펑가하고 있다.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였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웃시야가 바로 변질된 자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웃시야는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고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구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강성하게 된 웃시야는 그만 교만하게 되었고 악을 행함으로 급기야는 문둥병이라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노년을 불행하게 보내다 삶을 마감하고 말았다. 약하고 어려웠을 때는 겸손하게 하나님을 잘 경외하던 그가 강성해지니 그만 교만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웃시야의 모습을 통해서 약할 때보다 강성할 때가 더 신앙의 위기임을 깨닫게 된다. 사람은 강성할 때 변질되기 쉽다는 의미다. 따라서 웃시야가 교만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였기 때문이다. 죄의 근본은 하나님을 망각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웃시야가 하나님을 망각했다는 것은 형통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것이다. 자신을 선민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시고 때를 따라 놀라우신 기적으로 자신을 도우신 은혜를 잊어버린 것이다. 자신의 힘으로 된 줄로 착각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교만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곧 그것은 형통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가르쳤던 스가랴가 죽었기 때문이다. 영적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스가랴가 사라지자 웃시야는 교만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분향을 하게 된 것이다. 말씀을 벗어난 행동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교만함으로 말씀을 무시하고 분향을 하다가 웃시야는 문둥병자가 되었고 하나님의 전에서 쫓겨나 별궁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던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 문둥병환자로 살게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웃시야를 통해 깨닫게 된다.
계속해서 겸손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인생의 본분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겸손을 저버리고 변질되어 교만하면 결국은 패망의 인생으로 전락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이 되어도 결단코 변질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변질된다. 사울이 그랬고 솔로몬이 그랬고 역대 유다의 왕들이 거의 대부분 변질이 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성도인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잘 나갈 때 변질이 된다는 사실이다. 직분이 올라가면 지위가 높아지면 생활이 나아지면 언제 그랬었는가라고 목에 힘을 주고 교만한 모습으로 변질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 누구도 예외가 없다. 개구리가 올챙이 적을 기억하지 못하는 격이다. 그러므로 신앙이, 인격이 변질되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자.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항상 은혜를 사모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