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성결교회 양성환 선교사(오레곤선교교회 파송)
1. 우리의 구원을 예정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세계를 창조하기 이전에 무엇을 하셨을까? 성서에 일반적인 인식은 하나님은 창조하실 세계의 구원을 섭리하셨다고 서술한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구원의 예정을 고백한다. 아담이 타락한 이래로 이 세계는 악한 세계이고 인간은 악한 존재이다. 이 세계는 기독교의 안목으로 볼 때에 전혀 구원의 가능성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세계와 인간을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그는 이 모든 것을 구원코져 원하신다. 오늘도 기독교가 고백하는 하나님의 구원 예정은 파멸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이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선전 포고인 동시에 약속이다. 하나님의 구원 예정은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노력이나 수양이나 선한 행위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무한하신 주권과 은혜, 사랑에 있음을 알게 하는 데 있다. 죄인인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음은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아시고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예비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은혜와 사랑을 늘 감사하며 주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1) 이중예정에 대한 일반적 이해
하나님은 세계를 창조하시기 전에 구원받을 사람들과 멸망 받을 사람들을 예정하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이중 예정설이라고 부른다. 달리 말하여 이중 예정이란 구원의 예정과 멸망의 예정, 선택의 예정과 버림의 예정을 뜻한다. 교회사적으로 말하면, 어거스틴이 펠라기우스와 논쟁에서, 어거스틴은 구원의 견해에 의하면 인류는 영원 전부터 두 가지 종류로 나누어져 있다. 곧 구원의 선택을 받은 자와 선택을 받지 못한 자로 나누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논쟁에서 예정에 대한 이론이 전개됐다. 그 후에 칼빈은 논리적으로 분명하게 그리고 공공연하게 구원과 멸망으로의 이중적 예정론을 말했으며 서술하는 용기를 보여 주었다.(칼빈, 기독교 강요 |||,21,5). 칼빈은 자기의 생각에 대한 구약과 신약에서 여러 가지 성서적 근거를 말한다. 이삭과 야곱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으나 이스마엘과 에서는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것이다. 허나 자세히 성서와 현실을 보면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2) 이중예정의 불가피한 어려운 점들
가) 창조시에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에게 자유롭게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셨다.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할 수도 있고,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따 먹을 수도 있었다. 현실적으로 사람들이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을 수도 있고 이 복음을 거부함으로써 저주의 상태 속에 머무르는 경우를 많이 본다. 만약 우리의 구원과 멸망이 미리 정하여 있고 그의 예정에 따라 이루어진다면, 우리 인간의 자유로운 결단과 의지는 무의미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 인간의 자유와 응답이 부인되는 경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인간의 자발적이고 인격적인 응답이 불가능하다. 하나님과 인간의 인격적 교제와 사귐이 이루어질 수 없다. 회개와 믿음과 순종에 대한 부름과 요구도 불가능하다. 인간은 이 모든 것을 결단 할 수 있는 자유가 없다.
다) 우리의 구원과 멸망이 미리 결정되었다는 것은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하나의 운명론이요 숙명론이다. 실제적으로 나는 구원의 온전함을 위해 헌신하거나 애씀이 아무 의미가 없다. 더욱이 인간의 멸망이 이미 영원 전부터 결정된다는 것은 무시무시한 저주의 소식일 수밖에 없다.
라) 구원예정과 멸망예정이 이미 예정되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희생적인 사랑의 십자가와 복음의 능력이 단지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을 위한 것인가? 멸망받기로 예정된 자에게는 이 모든 것이 헛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의 구원자가 아닌가? 성서에도 일부 구원 예정자를 위해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다는 서술은 없다. 오히려 성서는 하나님은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그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셨다고 선언한다(롬8:23, 요3:16). 무한한 사랑의 하나님의 모습과 모순되는 이중예정설은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마) 전통적으로 예정론은 목회적인 안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신앙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믿지 않는 자가 있다는 사실에서부터 생각하게 된다. 거기서 구원받을 자와 버림받기로 예정된 자를 구분하게 된다. 허나 현실적으로 신앙자와 미숙한 신앙인을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다. 어느 누구도 자기의 신앙이 하나님의 구원의 예정을 보증할 만큼 완전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렇게 말하는 이가 있다면 오히려 영적으로 교만함일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모든 지식과 결정보다 앞선다. 이것이 바울이 전한 은혜의 메시지의 기초이다. 종교개혁자들이 바울의 이 메시지를 깊고 철저하게 다시 발견했으며, 웨슬레도 이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지식과 결정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작용하고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양면을 확실하게 붙잡아 전달하려 했던 것이 웨슬레의 기본적인 관심이었다. 우리는 이 시대에 맞게 새롭게 표현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미주성결교회 양성환 선교사(오레곤선교교회 파송)
1. 우리의 구원을 예정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세계를 창조하기 이전에 무엇을 하셨을까? 성서에 일반적인 인식은 하나님은 창조하실 세계의 구원을 섭리하셨다고 서술한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구원의 예정을 고백한다. 아담이 타락한 이래로 이 세계는 악한 세계이고 인간은 악한 존재이다. 이 세계는 기독교의 안목으로 볼 때에 전혀 구원의 가능성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세계와 인간을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그는 이 모든 것을 구원코져 원하신다. 오늘도 기독교가 고백하는 하나님의 구원 예정은 파멸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이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선전 포고인 동시에 약속이다. 하나님의 구원 예정은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노력이나 수양이나 선한 행위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무한하신 주권과 은혜, 사랑에 있음을 알게 하는 데 있다. 죄인인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음은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아시고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예비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은혜와 사랑을 늘 감사하며 주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1) 이중예정에 대한 일반적 이해
하나님은 세계를 창조하시기 전에 구원받을 사람들과 멸망 받을 사람들을 예정하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이중 예정설이라고 부른다. 달리 말하여 이중 예정이란 구원의 예정과 멸망의 예정, 선택의 예정과 버림의 예정을 뜻한다. 교회사적으로 말하면, 어거스틴이 펠라기우스와 논쟁에서, 어거스틴은 구원의 견해에 의하면 인류는 영원 전부터 두 가지 종류로 나누어져 있다. 곧 구원의 선택을 받은 자와 선택을 받지 못한 자로 나누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논쟁에서 예정에 대한 이론이 전개됐다. 그 후에 칼빈은 논리적으로 분명하게 그리고 공공연하게 구원과 멸망으로의 이중적 예정론을 말했으며 서술하는 용기를 보여 주었다.(칼빈, 기독교 강요 |||,21,5). 칼빈은 자기의 생각에 대한 구약과 신약에서 여러 가지 성서적 근거를 말한다. 이삭과 야곱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으나 이스마엘과 에서는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것이다. 허나 자세히 성서와 현실을 보면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2) 이중예정의 불가피한 어려운 점들
가) 창조시에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에게 자유롭게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셨다.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할 수도 있고,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따 먹을 수도 있었다. 현실적으로 사람들이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을 수도 있고 이 복음을 거부함으로써 저주의 상태 속에 머무르는 경우를 많이 본다. 만약 우리의 구원과 멸망이 미리 정하여 있고 그의 예정에 따라 이루어진다면, 우리 인간의 자유로운 결단과 의지는 무의미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 인간의 자유와 응답이 부인되는 경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인간의 자발적이고 인격적인 응답이 불가능하다. 하나님과 인간의 인격적 교제와 사귐이 이루어질 수 없다. 회개와 믿음과 순종에 대한 부름과 요구도 불가능하다. 인간은 이 모든 것을 결단 할 수 있는 자유가 없다.
다) 우리의 구원과 멸망이 미리 결정되었다는 것은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하나의 운명론이요 숙명론이다. 실제적으로 나는 구원의 온전함을 위해 헌신하거나 애씀이 아무 의미가 없다. 더욱이 인간의 멸망이 이미 영원 전부터 결정된다는 것은 무시무시한 저주의 소식일 수밖에 없다.
라) 구원예정과 멸망예정이 이미 예정되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희생적인 사랑의 십자가와 복음의 능력이 단지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을 위한 것인가? 멸망받기로 예정된 자에게는 이 모든 것이 헛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의 구원자가 아닌가? 성서에도 일부 구원 예정자를 위해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다는 서술은 없다. 오히려 성서는 하나님은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그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셨다고 선언한다(롬8:23, 요3:16). 무한한 사랑의 하나님의 모습과 모순되는 이중예정설은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마) 전통적으로 예정론은 목회적인 안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신앙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믿지 않는 자가 있다는 사실에서부터 생각하게 된다. 거기서 구원받을 자와 버림받기로 예정된 자를 구분하게 된다. 허나 현실적으로 신앙자와 미숙한 신앙인을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다. 어느 누구도 자기의 신앙이 하나님의 구원의 예정을 보증할 만큼 완전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렇게 말하는 이가 있다면 오히려 영적으로 교만함일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모든 지식과 결정보다 앞선다. 이것이 바울이 전한 은혜의 메시지의 기초이다. 종교개혁자들이 바울의 이 메시지를 깊고 철저하게 다시 발견했으며, 웨슬레도 이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지식과 결정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작용하고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양면을 확실하게 붙잡아 전달하려 했던 것이 웨슬레의 기본적인 관심이었다. 우리는 이 시대에 맞게 새롭게 표현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