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명환 목사(크리스천위클리 발행인)
웨슬리언 교단들, 즉 감리교, 성결교, 나사렛, 구세군 교회들은 매년 5월을 맞을 때마다 다른 교단에서는 없는 특별한 기념일 하나를 지킨다. 요한 웨슬리회심 기념주일이다. 금년은 5월 25일 주일이 그날이다.
‘올더스게이트의 날(Aldersgate Day)’이라고 부르는 교회도 있다. 올더스게이트는 지금도 런던에 있는 거리 이름이다. 회심 기념일과 올더스게이트는 무슨 상관이 있는가? 요한 웨슬리가 올더스게이트 거리에서 열린 모라비안 성도들의 집회에서 회심을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성령체험이었다.
이 올더스게이트 체험이후 완전히 달라진 웨슬리는 타락하고 부패한 영국을 복음으로 구원하는 역사의 출발점이 되었다.
옥스퍼드란 일류대학 출신이었지만 미국 조지아 주 사바나로 가서 선교사로 활동하는 동안 그는 부끄러운 ‘목회실패’를 경험했다. 그 실패와 절망을 반전시킨 웨슬리의 위대한 회심으로 말미암아 영국은 복음으로 깨어났고 감리교회도 탄생했다.
종교개혁 발상지 유럽 순례단을 모집하여 내가 영국에 갈 때마다 빼놓지 않고 가는 곳이 올더스게이트 체험 후 웨슬리가 처음 세운 교회, 브리스톨의 ‘뉴룸’이나 그가 다녔던 옥스퍼드 대학교의 크라이스트 처치 대학, 그리고 런던에 있는 웨슬리 채플 등이다.
채플을 방문할 때마다 나는 채플 뒤에 소박하게 자리잡고 있는 그의 무덤을 빼놓지 않고 둘러본다. 큰 석조도, 금박도 없다. 웨슬리는 이 조용한 자리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유언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내 관을 들 사람은 직업이 없는 실직자 중 네 명으로 하고, 각자에게 1파운드씩 주어라.” 죽는 순간까지 가난한 자들을 기억했던 그의 마음은, 화려한 세리머니보다 더 깊은 감동을 남긴다. 이것이 그가 믿고 따랐던 복음의 방식이었다.
웨슬리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종교개혁의 큰 별이었던 장 칼뱅은 죽은 후에 자신의 이름조차 남기지 않으려 했다. 스위스 제네바의 플랭팔레 공동묘지 어딘가에 그가 묻혀 있지만, 그의 이름이 새겨진 무덤은 없다. 다만 ‘Calvin’이라는 조그만 표식 하나가 초라하게 서 있을 뿐이다. 그의 뜻은 분명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만 영광을!” 칼뱅의 후계자이자 장로교 창시자로 알려진 존 낙스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선구자였다. 그의 무덤은 아예 눈에 띄지도 않는다. 에딘버러 자일스 대성당 뒤편, 오늘날의 주차장 23번 구역 아래 묻혀 있다고 추정할 뿐이다. 그 자리에 단지 ‘John Knox’라고 새겨진 작은 금속 표지가 있을 뿐이다.
무덤조차 눈에 띄지 않는 그 자리에, 스코틀랜드를 변화시킨 한 사람이 잠들어 있는 것이다. 이들보다 앞서 15세기 영어 성경 번역의 선구자였던 윌리암 틴데일도 화형을 당해 순교하면서 그의 무덤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 히틀러에 저항하다 강제수용소에서 교수형을 당했던 디트리히 본헤퍼의 무덤도 이 세상엔 없다. 아예 없는 사람들도 있지만 무덤이 있어도 아주 검소하고 조용하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죽음 이후에도 신앙의 증거로 살아 숨 쉬고 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돌아봐야 할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한편, 세상은 어떤가? 여전히 ‘기억되기 위한’ 무덤을 추구한다. 미국 워싱턴 DC 인근의 알링턴 국립묘지에는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부인 재클린의 무덤이 있다. 그리고 그 무덤 앞에는 ‘꺼지지 않는 불꽃(Eternal Flame)’이 지금도 타오르고 있다.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왕가의 즉위식이나 결혼식이 열리는 곳이지만 사실은 수많은 군주와 정치가, 시인들이 묻혀 있는 곳이다. 셰익스피어, 아이작 뉴턴, 윈스턴 처칠 등이 잠들어 있는 영국 최고의 무덤이다.
‘프랑스의 웨스트민스터’라고 할 수 있는 팡테옹에는 볼테르, 루소, 위고 등 프랑스의 위인들이 안치되어 있는 프랑스 국립묘지다. 인도의 타지마할도 인도 최고의 관광지로 변모했지만 무굴제국의 황제가 왕비를 위해 만든 무덤이다. 아마 세계적으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무덤일 것이다. 모두 사후의 명예를 위하여 세워진 인간의 탑들이다. 그러나 그 명예의 불꽃은 영원하지 않다. 그들의 명성과 권세는 시간이 흐르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흐릿해지고, 때로는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 재해석되며 빛을 잃는다.
그러나 웨슬리와 개혁자들의 작은 무덤은 오히려 영원한 생명을 말하고 있다. 그들은 살아서 하나님을 섬기고, 죽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그 겸손함은 진정한 위대함을 증언하며, 그 무덤은 말이 없이도 후세의 믿음을 일으키고 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두 무덤 사이에서 무엇을 바라보아야 할까? 세상이 세운 큰 무덤을 부러워할 것인가, 아니면 진실한 신앙의 흔적을 따라갈 것인가? 우리는 남기고 갈 이름이 아니라, 남기고 갈 신앙의 발자취를 고민해야 한다. 무덤은 입을 다물고 있지만, 삶이 남긴 진실은 지금도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 영광, 사람에겐 사랑, 나에겐 무덤조차 검소하게.” 이것이 웨슬리와 개혁자들이 우리에게 남긴 마지막 설교였다. 이번 주일은 그 웨슬리를 기념하는 웨슬리 회심기념주일이다.

조명환 목사(크리스천위클리 발행인)
웨슬리언 교단들, 즉 감리교, 성결교, 나사렛, 구세군 교회들은 매년 5월을 맞을 때마다 다른 교단에서는 없는 특별한 기념일 하나를 지킨다. 요한 웨슬리회심 기념주일이다. 금년은 5월 25일 주일이 그날이다.
‘올더스게이트의 날(Aldersgate Day)’이라고 부르는 교회도 있다. 올더스게이트는 지금도 런던에 있는 거리 이름이다. 회심 기념일과 올더스게이트는 무슨 상관이 있는가? 요한 웨슬리가 올더스게이트 거리에서 열린 모라비안 성도들의 집회에서 회심을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성령체험이었다.
이 올더스게이트 체험이후 완전히 달라진 웨슬리는 타락하고 부패한 영국을 복음으로 구원하는 역사의 출발점이 되었다.
옥스퍼드란 일류대학 출신이었지만 미국 조지아 주 사바나로 가서 선교사로 활동하는 동안 그는 부끄러운 ‘목회실패’를 경험했다. 그 실패와 절망을 반전시킨 웨슬리의 위대한 회심으로 말미암아 영국은 복음으로 깨어났고 감리교회도 탄생했다.
종교개혁 발상지 유럽 순례단을 모집하여 내가 영국에 갈 때마다 빼놓지 않고 가는 곳이 올더스게이트 체험 후 웨슬리가 처음 세운 교회, 브리스톨의 ‘뉴룸’이나 그가 다녔던 옥스퍼드 대학교의 크라이스트 처치 대학, 그리고 런던에 있는 웨슬리 채플 등이다.
채플을 방문할 때마다 나는 채플 뒤에 소박하게 자리잡고 있는 그의 무덤을 빼놓지 않고 둘러본다. 큰 석조도, 금박도 없다. 웨슬리는 이 조용한 자리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유언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내 관을 들 사람은 직업이 없는 실직자 중 네 명으로 하고, 각자에게 1파운드씩 주어라.” 죽는 순간까지 가난한 자들을 기억했던 그의 마음은, 화려한 세리머니보다 더 깊은 감동을 남긴다. 이것이 그가 믿고 따랐던 복음의 방식이었다.
웨슬리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종교개혁의 큰 별이었던 장 칼뱅은 죽은 후에 자신의 이름조차 남기지 않으려 했다. 스위스 제네바의 플랭팔레 공동묘지 어딘가에 그가 묻혀 있지만, 그의 이름이 새겨진 무덤은 없다. 다만 ‘Calvin’이라는 조그만 표식 하나가 초라하게 서 있을 뿐이다. 그의 뜻은 분명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만 영광을!” 칼뱅의 후계자이자 장로교 창시자로 알려진 존 낙스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선구자였다. 그의 무덤은 아예 눈에 띄지도 않는다. 에딘버러 자일스 대성당 뒤편, 오늘날의 주차장 23번 구역 아래 묻혀 있다고 추정할 뿐이다. 그 자리에 단지 ‘John Knox’라고 새겨진 작은 금속 표지가 있을 뿐이다.
무덤조차 눈에 띄지 않는 그 자리에, 스코틀랜드를 변화시킨 한 사람이 잠들어 있는 것이다. 이들보다 앞서 15세기 영어 성경 번역의 선구자였던 윌리암 틴데일도 화형을 당해 순교하면서 그의 무덤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 히틀러에 저항하다 강제수용소에서 교수형을 당했던 디트리히 본헤퍼의 무덤도 이 세상엔 없다. 아예 없는 사람들도 있지만 무덤이 있어도 아주 검소하고 조용하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죽음 이후에도 신앙의 증거로 살아 숨 쉬고 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돌아봐야 할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한편, 세상은 어떤가? 여전히 ‘기억되기 위한’ 무덤을 추구한다. 미국 워싱턴 DC 인근의 알링턴 국립묘지에는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부인 재클린의 무덤이 있다. 그리고 그 무덤 앞에는 ‘꺼지지 않는 불꽃(Eternal Flame)’이 지금도 타오르고 있다.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왕가의 즉위식이나 결혼식이 열리는 곳이지만 사실은 수많은 군주와 정치가, 시인들이 묻혀 있는 곳이다. 셰익스피어, 아이작 뉴턴, 윈스턴 처칠 등이 잠들어 있는 영국 최고의 무덤이다.
‘프랑스의 웨스트민스터’라고 할 수 있는 팡테옹에는 볼테르, 루소, 위고 등 프랑스의 위인들이 안치되어 있는 프랑스 국립묘지다. 인도의 타지마할도 인도 최고의 관광지로 변모했지만 무굴제국의 황제가 왕비를 위해 만든 무덤이다. 아마 세계적으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무덤일 것이다. 모두 사후의 명예를 위하여 세워진 인간의 탑들이다. 그러나 그 명예의 불꽃은 영원하지 않다. 그들의 명성과 권세는 시간이 흐르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흐릿해지고, 때로는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 재해석되며 빛을 잃는다.
그러나 웨슬리와 개혁자들의 작은 무덤은 오히려 영원한 생명을 말하고 있다. 그들은 살아서 하나님을 섬기고, 죽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그 겸손함은 진정한 위대함을 증언하며, 그 무덤은 말이 없이도 후세의 믿음을 일으키고 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두 무덤 사이에서 무엇을 바라보아야 할까? 세상이 세운 큰 무덤을 부러워할 것인가, 아니면 진실한 신앙의 흔적을 따라갈 것인가? 우리는 남기고 갈 이름이 아니라, 남기고 갈 신앙의 발자취를 고민해야 한다. 무덤은 입을 다물고 있지만, 삶이 남긴 진실은 지금도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 영광, 사람에겐 사랑, 나에겐 무덤조차 검소하게.” 이것이 웨슬리와 개혁자들이 우리에게 남긴 마지막 설교였다. 이번 주일은 그 웨슬리를 기념하는 웨슬리 회심기념주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