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명환 목사(크리스천위클리 발행인)
한국의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탄핵사태로 정국이 어수선한 가운데 월스트릿 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어떤 사람들은 나를 한국의 트럼프 같다고 말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킥킥 웃음이 나왔다. 둘은 전과자란 공통점이 있지만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사법리스크를 훌훌 벗어 버린 트럼프 당선자에 대한 한없는 부러움이 작동해서 “나도 저런 때가 빨리 왔으면!” 아마 그런 간절한 염원이 숨어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세상 권력자들은 트럼프가 되기를 원하는지 모른다. 스트롱맨이기 때문이다. 지금 지구촌은 스트롱맨 전성시대다. 스트롱맨은 일반적으로 언행이 거칠고 자국 국익만 고집하는 모습을 보인다. 스트롱맨이란 좋게 말해 카리스마 리더십이라 할 수 있지만 강압적, 폭력적 수단으로 권위주의 정권을 유지하는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독재자라고도 하지만 철권통치자란 말도 쓴다. 스트롱맨은 공산주의 국가에만 있는 게 아니다. 지금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등장함으로 2차 대전 후 지속적으로 확산되던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있는 중이다.
예를 들어 보자. 북한의 어린 김정은이부터 러시아의 푸틴, 중국의 시진핑은 아예 구제불능 독재자 축에 들어간다고 치자. 그런데 이들 독재자들과 비스므리하게 튀르키에의 에르도안이나 인도의 모디, 그리고 브라질의 룰라도 그 반열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미국에서 트럼프가 재선되는 걸 보고 세계의 스트롱맨들은 흥분하고 있을 것이다. 법을 뜯어 고쳐서라도, 민주주의고 뭐고 팽개치고 제2의 트럼프가 되어 강인하고 제왕적인 대통령으로 군림하여 거침없이 권력의 꿀맛에 취해보고 싶은 욕망 때문일 것이다. 자기에게 충성을 맹세한 사람들을 초등학교 반장 일으켜 세우듯이 세계최고 강대국의 장관이나 백악관 요직에 꼬라박는 모습은 세계 스트롱맨들의 부러움을 살만하다.
그러나 스트롱맨들이여!. 알아사드를 보라.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중동의 스트롱맨이 지난주 러시아로 도망치고 말았다. 근사한 말로 망명이지 사실은 뺑소니다. 그는 ‘중동의 학살자’로 불렸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으면 이런 별명이 붙었을까?
2011년 민주화 요구시위인 ‘아랍의 봄’ 당시 유혈진압하면서 무자비한 독재자로 변신한 인물이다. 내전 감시단체 시리아인권관측소(SOHR)에 따르면 내전 발발 이후 지난 13년간 누적 사망자는 62만 명이다. 유엔난민기구(UNHCR)에 따르면 정식으로 등록된 시리아 난민은 지난달 기준 481만7000명. 그의 뒷배 역할을 하던 이란과 러시아가 자기네 전쟁으로 힘이 빠지자 결국 반군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러시아로 도망친 것이다. 이미 그는 비행기 추락사했다는 설도 있다. 강할수록 꺾일 때는 이렇게 비참해 진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스트롱맨에 열광하는 시대의 광기에 그냥 빨려 들어가는 걸 경계해야 한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는 스트롱이 아니다. 겸손이고 관용이다. 약함으로 강함을 이기는 역설을 믿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종교개혁의 나라, 혹은 마르틴 루터의 나라인 독일에서 개혁은 고사하고 독일교회는 왜 히틀러의 광기에 농락당해야 했는가? 나치가 공산주의로부터 교회를 보호해 줄 테니 나치의 정책을 지지하고 따라 달라고 회유하는 바람에 히틀러란 괴물이 세계 2차 대전이란 비극을 몰고 오게 했다. 결국 교회는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을 동조하거나 지지를 보냈다. 독일교회의 흑역사인 셈이다.
스트롱맨은 아니었지만 ‘허약한 리더십’으로 별로 존경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금년 100세를 맞은 지미 카터 대통령은 은퇴 후에 오히려 더 많은 미국인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는 대통령이다.
은퇴 후 모든 걸 내려놓고 주일학교 선생님으로 교회에서 봉사하거나 또는 해비타트 운동에 적극 뛰어들어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해 망치를 들고 건축현장을 누비던 전직 대통령이었다.
낮아짐으로 더욱 빛나는 리더십이 아닌가? 우리가 존경하고 추구해야 할 리더십은 이런 겸손의 리더십, 섬김의 리더십이다.
지난주 열린 남가주중보기도팀연합기도회에서는 트럼프 당선자가 하나님께 순종하며 이 나라를 잘 다스리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우리들의 대통령이 스트롱맨이란 이미지보다는 내년 1월 20일 대통령 취임 선서 때 손을 얹고 기도하게 될 성경 말씀에 따라 나라를 다스려주는 대통령이 되기를 기도하자. ‘트럼피즘’이란 광기에 휩쓸리지 않고 지혜롭고 겸손하게 나라를 섬기는 지도자가 되기를 기도하자.
연합기도회에서는 또 계엄이다, 탄핵이다, 우리들의 가슴을 쓸어내리게 하는 한국의 정치적 격변기에 하나님의 뜻이 거기 임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고마운 일이다. 우리 교계에 그런 기도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하고 자랑스러운 일인가?
스트롱맨이나 독재자에게 매료되는 이상한 시대정신 이면에는 공허를 채울 수 없는 영혼의 허기짐이 이유일 수도 있다. 이 불확실한 세상 속에 고요히 아기의 모습으로 찾아오시는 예수님으로 그 공허를 채우는 길 외에 어디 다른 길이 있는가?

조명환 목사(크리스천위클리 발행인)
한국의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탄핵사태로 정국이 어수선한 가운데 월스트릿 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어떤 사람들은 나를 한국의 트럼프 같다고 말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킥킥 웃음이 나왔다. 둘은 전과자란 공통점이 있지만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사법리스크를 훌훌 벗어 버린 트럼프 당선자에 대한 한없는 부러움이 작동해서 “나도 저런 때가 빨리 왔으면!” 아마 그런 간절한 염원이 숨어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세상 권력자들은 트럼프가 되기를 원하는지 모른다. 스트롱맨이기 때문이다. 지금 지구촌은 스트롱맨 전성시대다. 스트롱맨은 일반적으로 언행이 거칠고 자국 국익만 고집하는 모습을 보인다. 스트롱맨이란 좋게 말해 카리스마 리더십이라 할 수 있지만 강압적, 폭력적 수단으로 권위주의 정권을 유지하는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독재자라고도 하지만 철권통치자란 말도 쓴다. 스트롱맨은 공산주의 국가에만 있는 게 아니다. 지금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등장함으로 2차 대전 후 지속적으로 확산되던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있는 중이다.
예를 들어 보자. 북한의 어린 김정은이부터 러시아의 푸틴, 중국의 시진핑은 아예 구제불능 독재자 축에 들어간다고 치자. 그런데 이들 독재자들과 비스므리하게 튀르키에의 에르도안이나 인도의 모디, 그리고 브라질의 룰라도 그 반열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미국에서 트럼프가 재선되는 걸 보고 세계의 스트롱맨들은 흥분하고 있을 것이다. 법을 뜯어 고쳐서라도, 민주주의고 뭐고 팽개치고 제2의 트럼프가 되어 강인하고 제왕적인 대통령으로 군림하여 거침없이 권력의 꿀맛에 취해보고 싶은 욕망 때문일 것이다. 자기에게 충성을 맹세한 사람들을 초등학교 반장 일으켜 세우듯이 세계최고 강대국의 장관이나 백악관 요직에 꼬라박는 모습은 세계 스트롱맨들의 부러움을 살만하다.
그러나 스트롱맨들이여!. 알아사드를 보라.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중동의 스트롱맨이 지난주 러시아로 도망치고 말았다. 근사한 말로 망명이지 사실은 뺑소니다. 그는 ‘중동의 학살자’로 불렸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으면 이런 별명이 붙었을까?
2011년 민주화 요구시위인 ‘아랍의 봄’ 당시 유혈진압하면서 무자비한 독재자로 변신한 인물이다. 내전 감시단체 시리아인권관측소(SOHR)에 따르면 내전 발발 이후 지난 13년간 누적 사망자는 62만 명이다. 유엔난민기구(UNHCR)에 따르면 정식으로 등록된 시리아 난민은 지난달 기준 481만7000명. 그의 뒷배 역할을 하던 이란과 러시아가 자기네 전쟁으로 힘이 빠지자 결국 반군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러시아로 도망친 것이다. 이미 그는 비행기 추락사했다는 설도 있다. 강할수록 꺾일 때는 이렇게 비참해 진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스트롱맨에 열광하는 시대의 광기에 그냥 빨려 들어가는 걸 경계해야 한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는 스트롱이 아니다. 겸손이고 관용이다. 약함으로 강함을 이기는 역설을 믿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종교개혁의 나라, 혹은 마르틴 루터의 나라인 독일에서 개혁은 고사하고 독일교회는 왜 히틀러의 광기에 농락당해야 했는가? 나치가 공산주의로부터 교회를 보호해 줄 테니 나치의 정책을 지지하고 따라 달라고 회유하는 바람에 히틀러란 괴물이 세계 2차 대전이란 비극을 몰고 오게 했다. 결국 교회는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을 동조하거나 지지를 보냈다. 독일교회의 흑역사인 셈이다.
스트롱맨은 아니었지만 ‘허약한 리더십’으로 별로 존경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금년 100세를 맞은 지미 카터 대통령은 은퇴 후에 오히려 더 많은 미국인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는 대통령이다.
은퇴 후 모든 걸 내려놓고 주일학교 선생님으로 교회에서 봉사하거나 또는 해비타트 운동에 적극 뛰어들어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해 망치를 들고 건축현장을 누비던 전직 대통령이었다.
낮아짐으로 더욱 빛나는 리더십이 아닌가? 우리가 존경하고 추구해야 할 리더십은 이런 겸손의 리더십, 섬김의 리더십이다.
지난주 열린 남가주중보기도팀연합기도회에서는 트럼프 당선자가 하나님께 순종하며 이 나라를 잘 다스리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우리들의 대통령이 스트롱맨이란 이미지보다는 내년 1월 20일 대통령 취임 선서 때 손을 얹고 기도하게 될 성경 말씀에 따라 나라를 다스려주는 대통령이 되기를 기도하자. ‘트럼피즘’이란 광기에 휩쓸리지 않고 지혜롭고 겸손하게 나라를 섬기는 지도자가 되기를 기도하자.
연합기도회에서는 또 계엄이다, 탄핵이다, 우리들의 가슴을 쓸어내리게 하는 한국의 정치적 격변기에 하나님의 뜻이 거기 임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고마운 일이다. 우리 교계에 그런 기도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하고 자랑스러운 일인가?
스트롱맨이나 독재자에게 매료되는 이상한 시대정신 이면에는 공허를 채울 수 없는 영혼의 허기짐이 이유일 수도 있다. 이 불확실한 세상 속에 고요히 아기의 모습으로 찾아오시는 예수님으로 그 공허를 채우는 길 외에 어디 다른 길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