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용주 목사(봉헤치로 제일교회 담임)
첫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피터에게, 아슬란은 자기에게 검을 바치고 무릎을 꿇으라고 한다. 숨을 헐떡거리고 겨우 고개를 가누는 피터가 그 말 대로 하자, 그는 검을 옆으로 뉘어 피터의 어깨에 대며 말한다. “일어서라, 늑대를 제압한 자 피터 경!” 아슬란은 적을 가까스로 이긴 피터를 자기 나라의 기사로 임명한 것이다.
그러나 말하는 늑대가 아무리 흉맹한 적이라 해도, 그까짓 한 마리 죽인 것이 그에게 기사의 작위를 내릴 정도로 큰 전공일까? 분명 아니다. 그래서 형평성이 어긋나 보인다. 그러나 바로 이 장면에서, 우리는 한량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긍휼을 보게 된다.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을 잘 안다. 시편 51편 5절 말씀과 같이, 우리는 죄 가운에 잉태되고 죄 가운데 난, 참으로 어찌할 수 없는 죄인들이다. 또 이 죄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재도 아니다. 반대로, 어려서나 나이 들어서나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나 인내심이 조금도 없다. 참으로 우리 안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 때문에 이런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 크나큰 죄로부터 구원하셨단 말인가? 또한, 구원 이후에도 끊임없이 다시 죄를 짓는 데로 돌아가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것은 아주 조그맣게 행하는 것밖에 없는데, 어찌 이 조그만 것을 보시고 상을 넘치게 주신단 말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어린이를 사랑하는 어른들이라도, 자기 자식 사랑하는 것같이 다른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는다. 자기 자식이 다른 아이들과 동일한 행동을 해도, 결코 그것이 동일하게 보이지 않는다. 자기 자식이 다른 아이들보다 더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즉, 사랑이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죄로부터 건지셨고,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구원 이후 모든 여정에서 우리가 행한 자그마한 선과 의를 크게 보시고 잔이 넘치도록 부어 주시며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잔칫상을 베푸시는 것이다. 피터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슬란은 그가 거둔 자그마한 승리 하나에도 크게 반응하여, 그에게 자기 왕국의 기사 작위를 수여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 때부터 피터는 한동안 피터 ‘경’이라고 불리게 된다.
피터, 나니아 왕국의 태왕이 되다!
이 때의 경험이 피터로 하여금 나중에 하얀 마녀와 막상막하로 싸우게 하였다. 부활한 아슬란이 수잔과 루시와 다른 부활한 동물들을 데리고 전장에 도착했을 때, “마녀의 돌칼과 피터의 검이 어찌나 빠르게 움직이는지, 루시의 눈에 마치 세 자루의 칼과 세 자루의 검이 맞부딪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나니아 연대기 』제 2권 「사자와 마녀와 옷장」 208쪽).” 하얀 마녀는 아슬란을 죽인 막강한 적이다. 그런데 피터는 지금 그런 그녀와 대등하게 싸우고 있는 것이었다. 마침내 아슬란과 그의 군대가 도착하고, 몇 분 만에 큰 승리를 거두며 끝나게 되었다.
이 전투 이후, “피터의 모습이 루시에게는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피터의 얼굴은 몹시 창백하고 결연했으며 전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였다.” 마녀와의 힘겨운 싸움에서 이긴 그는, 그만큼 더 성숙해진 것이었다.

여용주 목사(봉헤치로 제일교회 담임)
첫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피터에게, 아슬란은 자기에게 검을 바치고 무릎을 꿇으라고 한다. 숨을 헐떡거리고 겨우 고개를 가누는 피터가 그 말 대로 하자, 그는 검을 옆으로 뉘어 피터의 어깨에 대며 말한다. “일어서라, 늑대를 제압한 자 피터 경!” 아슬란은 적을 가까스로 이긴 피터를 자기 나라의 기사로 임명한 것이다.
그러나 말하는 늑대가 아무리 흉맹한 적이라 해도, 그까짓 한 마리 죽인 것이 그에게 기사의 작위를 내릴 정도로 큰 전공일까? 분명 아니다. 그래서 형평성이 어긋나 보인다. 그러나 바로 이 장면에서, 우리는 한량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긍휼을 보게 된다.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을 잘 안다. 시편 51편 5절 말씀과 같이, 우리는 죄 가운에 잉태되고 죄 가운데 난, 참으로 어찌할 수 없는 죄인들이다. 또 이 죄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재도 아니다. 반대로, 어려서나 나이 들어서나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나 인내심이 조금도 없다. 참으로 우리 안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 때문에 이런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 크나큰 죄로부터 구원하셨단 말인가? 또한, 구원 이후에도 끊임없이 다시 죄를 짓는 데로 돌아가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것은 아주 조그맣게 행하는 것밖에 없는데, 어찌 이 조그만 것을 보시고 상을 넘치게 주신단 말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어린이를 사랑하는 어른들이라도, 자기 자식 사랑하는 것같이 다른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는다. 자기 자식이 다른 아이들과 동일한 행동을 해도, 결코 그것이 동일하게 보이지 않는다. 자기 자식이 다른 아이들보다 더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즉, 사랑이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죄로부터 건지셨고,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구원 이후 모든 여정에서 우리가 행한 자그마한 선과 의를 크게 보시고 잔이 넘치도록 부어 주시며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잔칫상을 베푸시는 것이다. 피터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슬란은 그가 거둔 자그마한 승리 하나에도 크게 반응하여, 그에게 자기 왕국의 기사 작위를 수여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 때부터 피터는 한동안 피터 ‘경’이라고 불리게 된다.
피터, 나니아 왕국의 태왕이 되다!
이 때의 경험이 피터로 하여금 나중에 하얀 마녀와 막상막하로 싸우게 하였다. 부활한 아슬란이 수잔과 루시와 다른 부활한 동물들을 데리고 전장에 도착했을 때, “마녀의 돌칼과 피터의 검이 어찌나 빠르게 움직이는지, 루시의 눈에 마치 세 자루의 칼과 세 자루의 검이 맞부딪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나니아 연대기 』제 2권 「사자와 마녀와 옷장」 208쪽).” 하얀 마녀는 아슬란을 죽인 막강한 적이다. 그런데 피터는 지금 그런 그녀와 대등하게 싸우고 있는 것이었다. 마침내 아슬란과 그의 군대가 도착하고, 몇 분 만에 큰 승리를 거두며 끝나게 되었다.
이 전투 이후, “피터의 모습이 루시에게는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피터의 얼굴은 몹시 창백하고 결연했으며 전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였다.” 마녀와의 힘겨운 싸움에서 이긴 그는, 그만큼 더 성숙해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