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수명 목사(나누리선교회장)
어느 사람이 교회를 오래 다녀 집사가 되었지만 매번 부정적이며 비판적이었다. 하루는 목사님에게 “목사님, 교회에서는 늘 죄의 짐이 무거운 것이라고 하고 또 목사님도 말씀하시기를 무거운 죄짐을 벗어버려야 한다”고 매번 설교하시는데 저는 아무 짐도 못느끼거든요 도대체 그 죄짐이라는게 얼마나 무게가 나갑니까? 한 30킬로 정도 나가나요? 아니면 40킬로 정도 되나요?”하고 물었다.
그때 목사님이 “집사님, 만일 여기에 죽은 사람이 한 사람 있는데 그 위에다 100킬로 되는 돌을 올려놓으면 그 죽은 사람이 무게를 느낄 수 있을까요?” 그러자 그 집사가 “아니 목사님 죽은 사람이 무엇을 느끼겠어요?”하자 목사님이 집사님에게 “집사님, 죄의 무게를 못 느끼는 사람은 육신은 살아있으나 영은 죽었든지 또는 죄라는 마취약에 중독되어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이 살아있는 사람은 10그램의 돌이라도 짐으로 느끼게 됩니다”하였다.
그럼 죄의 무게는 무엇으로 그 무게를 알 수 있는가? 깨닫는 일이다. 깨달음에는 여러 모습이 있다. 우선 듣고 깨닫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매 맞고 깨닫는 사람이 있고 다 잃어버리고 나서야 뒤늦게 깨닫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어디에 속한 사람인가? 대부분 잃어버린 다음에야 그 가치의 소중함을 깨닫는 경우가 많다. 가정이 깨져보고야 부부의 귀중함과 자녀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준 것의 아픔을 두고두고 경험하게 된다. 사업이 망해보고야 ‘내가 너무 욕심을 내었구나’하고 깨닫게 된다. 그리고 말을 함부로 해 친했던 사이가 틀어져 후회가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강관리를 잘 하지 않아서 병원에 누워 고통당할 때 건강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이런 어려움을 당했을 때 이것이 모두 죄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죄의 무게이다. 이 죄의 무게를 느끼는 사람은 영이 살아있는 사람이다. 반대로 이러한 고통가운데에서 죄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영이 죽어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어리석은 것은 사람이 죽을 지경이 되어야 잘못을 깨닫고 후회하다가도 조금만 사정이 나아지면 또 옛날로 돌아간다. 죽은 줄 알았던 내 죄가 다시 살아나고 또다시 실패의 길로, 망하는 길로 달려가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반복하며 살아간다.
누가복음 16장 19절에는 정말 불쌍한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한 부자와 한 거지의 모습이다. 여기서 정말 어리석은 부자는 죽은 다음에 음부(지옥)에서 깨닫고 회개하며 24절에서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거지)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 고민하나이다”하고 몸부림치며 외칠 때 아브라함이 26절에서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 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하셨다. 이 부자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회개할 기회가 없어졌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왜냐하면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죄를 회개할 수 있고 용서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아직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내 죄악의 무게를 느껴야 한다. 하늘과 땅 바다 속까지 우리가 죄를 짓도록 마귀가 곳곳에 그물을 쳐 놓았다.
종교개혁을 한 마틴루터는 “새가 내 위를 날아다니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내 머리에 새가 앉으면 쫓아 버릴 수 있다”고 한 말처럼 이 세상의 유혹이 내 주위를 돌아다니는 것을 내가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나에게 유혹이 달려들 때는 나사렛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물리쳐야 한다.
그래도 내가 약해서 죄를 지었으면 역시 나사렛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회개하여 죄사함 받도록 해야 한다.
날마다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의 저울로 내 죄의 무게를 달아 10그램이라도 나오면 회개하라는 선물임을 기억하여 회개하자. 감사하며 아멘.

이수명 목사(나누리선교회장)
어느 사람이 교회를 오래 다녀 집사가 되었지만 매번 부정적이며 비판적이었다. 하루는 목사님에게 “목사님, 교회에서는 늘 죄의 짐이 무거운 것이라고 하고 또 목사님도 말씀하시기를 무거운 죄짐을 벗어버려야 한다”고 매번 설교하시는데 저는 아무 짐도 못느끼거든요 도대체 그 죄짐이라는게 얼마나 무게가 나갑니까? 한 30킬로 정도 나가나요? 아니면 40킬로 정도 되나요?”하고 물었다.
그때 목사님이 “집사님, 만일 여기에 죽은 사람이 한 사람 있는데 그 위에다 100킬로 되는 돌을 올려놓으면 그 죽은 사람이 무게를 느낄 수 있을까요?” 그러자 그 집사가 “아니 목사님 죽은 사람이 무엇을 느끼겠어요?”하자 목사님이 집사님에게 “집사님, 죄의 무게를 못 느끼는 사람은 육신은 살아있으나 영은 죽었든지 또는 죄라는 마취약에 중독되어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이 살아있는 사람은 10그램의 돌이라도 짐으로 느끼게 됩니다”하였다.
그럼 죄의 무게는 무엇으로 그 무게를 알 수 있는가? 깨닫는 일이다. 깨달음에는 여러 모습이 있다. 우선 듣고 깨닫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매 맞고 깨닫는 사람이 있고 다 잃어버리고 나서야 뒤늦게 깨닫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어디에 속한 사람인가? 대부분 잃어버린 다음에야 그 가치의 소중함을 깨닫는 경우가 많다. 가정이 깨져보고야 부부의 귀중함과 자녀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준 것의 아픔을 두고두고 경험하게 된다. 사업이 망해보고야 ‘내가 너무 욕심을 내었구나’하고 깨닫게 된다. 그리고 말을 함부로 해 친했던 사이가 틀어져 후회가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강관리를 잘 하지 않아서 병원에 누워 고통당할 때 건강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이런 어려움을 당했을 때 이것이 모두 죄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죄의 무게이다. 이 죄의 무게를 느끼는 사람은 영이 살아있는 사람이다. 반대로 이러한 고통가운데에서 죄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영이 죽어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어리석은 것은 사람이 죽을 지경이 되어야 잘못을 깨닫고 후회하다가도 조금만 사정이 나아지면 또 옛날로 돌아간다. 죽은 줄 알았던 내 죄가 다시 살아나고 또다시 실패의 길로, 망하는 길로 달려가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반복하며 살아간다.
누가복음 16장 19절에는 정말 불쌍한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한 부자와 한 거지의 모습이다. 여기서 정말 어리석은 부자는 죽은 다음에 음부(지옥)에서 깨닫고 회개하며 24절에서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거지)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 고민하나이다”하고 몸부림치며 외칠 때 아브라함이 26절에서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 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하셨다. 이 부자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회개할 기회가 없어졌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왜냐하면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죄를 회개할 수 있고 용서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아직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내 죄악의 무게를 느껴야 한다. 하늘과 땅 바다 속까지 우리가 죄를 짓도록 마귀가 곳곳에 그물을 쳐 놓았다.
종교개혁을 한 마틴루터는 “새가 내 위를 날아다니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내 머리에 새가 앉으면 쫓아 버릴 수 있다”고 한 말처럼 이 세상의 유혹이 내 주위를 돌아다니는 것을 내가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나에게 유혹이 달려들 때는 나사렛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물리쳐야 한다.
그래도 내가 약해서 죄를 지었으면 역시 나사렛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회개하여 죄사함 받도록 해야 한다.
날마다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의 저울로 내 죄의 무게를 달아 10그램이라도 나오면 회개하라는 선물임을 기억하여 회개하자. 감사하며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