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용주 목사(봉헤치로 제일교회 담임)
맥켄지(Mackenzie)의 설립
1862년 미국 북장로교회로부터 교육선교사로 파송 받은 조지 챔벌레인은 4년 후인 1866년에 히오 지 쟈네이로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에도 여전히 교육사역을 병행하였습니다. 목사 안수를 받은 후 본격적으로 교회 개척사역에 매진하게 된 챔벌레인 선교사가 또한 교육사역을 성공적으로 수행하한 것에는 아내 메리 앤 애너슬리 챔벌레인(Mary Ann Annesley Chamberlain) 사모의 조력이 컸습니다.
1869년, 챔벌레인 목사는 블랙포드 선교사가 조직한 상파울로 장로교회의 담임으로 부임하였습니다. 이듬해, 챔벌레인 목사 부부는 자신들의 사택 거실에서 노예 출신 아이들, 또는 로마 카톨릭교를 믿지 않는 가정에서 태어나 일반학교를 다닐 수 없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당을 열고 이름을 ‘미국학교(Escola Americana)’라고 붙였습니다. 몇 달 만에 더 이상 거실에서 가르칠 수 없을 만큼 학생들이 많이 늘자, 학교는 교회 부속건물로 옮겼습니다. 학생들이 계속 늘어 교회 부속건물도 비좁아지자, 1876년에 이삐렁가 대로(Avenida Ipiranga)와 성 죠엉 대로(Avenida São João)가 교차하는 곳에 위치한 건물로 옮겼습니다. 마침 교인 수도 급증하여, 교회도 같은 곳으로 옮겼다가 1884년에 다른 곳으로 옮겼습니다.
‘미국학교’ 학생들이 계속 늘어 새 부지를 구하던 차에, 학부형 중 한 명인 마리아 언또니아(Maria Antônia) 후작부인이 이지에노뽈리스(Higienópolis)에 위치한 자신의 농장을 챔벌레인 선교사 부부에게 팔았습니다. 챔벌레인 목사는 새 부지에 필요한 시설 건설을 위한 후원처를 구하여 건물들을 지은 뒤, 드디어 1879년에 학교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상파울로 장로교회 목사관에서 학당을 개설한 지 꼭 10년 만이었습니다.
챔벌레인 선교사 부부의 이러한 교육사역은 미국에도 널리 알려져서, 브라질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는 변호사 존 맥켄지(John T. Mackenzie)와 두 여동생이 거액의 장학금을 기부하였습니다. 이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챔벌레인 선교사는 학교 이름에 ‘맥켄지’를 덧붙이고, 교수진을 꾸려 ‘맥켄지 대학(Mackenzie College)’을 설립하였습니다. 이것이 ‘맥켄지 미국학교 및 장로교 대학교(Escola Americana e Universidade Presbiteriana Mackenzie)’입니다. 이 종합학교는 1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이지에노뽈리스에 위치해 있습니다.
미션 스쿨인 맥켄지에 세워진 첫 건물의 머릿돌에는 다음과 같은 성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딤전 1:17).”
침례교회 선교
미국 북장로교회가 파송한 첫 선교사가 아직 브라질에 도착하기 몇 달 전인 1859년 3월 30일, 토머스 제퍼슨 바우엔(Thomas Jefferson Bowen) 선교사가 가족과 함께 히오 지 쟈네이로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들은 미국에서 아프리카 서부에서 노예로 잡혀온 흑인 부족인 요루바(Ioruba) 족을 대상으로 사역을 한 경험이 있어서 요루바 어를 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브라질에서도 요루바 족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흑인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언어로 선교사역을 하는 것이 브라질 당국의 의심을 불러일으키게 되어, 바우엔 선교사 부부는 구속되기도 하였습니다.

여용주 목사(봉헤치로 제일교회 담임)
맥켄지(Mackenzie)의 설립
1862년 미국 북장로교회로부터 교육선교사로 파송 받은 조지 챔벌레인은 4년 후인 1866년에 히오 지 쟈네이로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에도 여전히 교육사역을 병행하였습니다. 목사 안수를 받은 후 본격적으로 교회 개척사역에 매진하게 된 챔벌레인 선교사가 또한 교육사역을 성공적으로 수행하한 것에는 아내 메리 앤 애너슬리 챔벌레인(Mary Ann Annesley Chamberlain) 사모의 조력이 컸습니다.
1869년, 챔벌레인 목사는 블랙포드 선교사가 조직한 상파울로 장로교회의 담임으로 부임하였습니다. 이듬해, 챔벌레인 목사 부부는 자신들의 사택 거실에서 노예 출신 아이들, 또는 로마 카톨릭교를 믿지 않는 가정에서 태어나 일반학교를 다닐 수 없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당을 열고 이름을 ‘미국학교(Escola Americana)’라고 붙였습니다. 몇 달 만에 더 이상 거실에서 가르칠 수 없을 만큼 학생들이 많이 늘자, 학교는 교회 부속건물로 옮겼습니다. 학생들이 계속 늘어 교회 부속건물도 비좁아지자, 1876년에 이삐렁가 대로(Avenida Ipiranga)와 성 죠엉 대로(Avenida São João)가 교차하는 곳에 위치한 건물로 옮겼습니다. 마침 교인 수도 급증하여, 교회도 같은 곳으로 옮겼다가 1884년에 다른 곳으로 옮겼습니다.
‘미국학교’ 학생들이 계속 늘어 새 부지를 구하던 차에, 학부형 중 한 명인 마리아 언또니아(Maria Antônia) 후작부인이 이지에노뽈리스(Higienópolis)에 위치한 자신의 농장을 챔벌레인 선교사 부부에게 팔았습니다. 챔벌레인 목사는 새 부지에 필요한 시설 건설을 위한 후원처를 구하여 건물들을 지은 뒤, 드디어 1879년에 학교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상파울로 장로교회 목사관에서 학당을 개설한 지 꼭 10년 만이었습니다.
챔벌레인 선교사 부부의 이러한 교육사역은 미국에도 널리 알려져서, 브라질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는 변호사 존 맥켄지(John T. Mackenzie)와 두 여동생이 거액의 장학금을 기부하였습니다. 이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챔벌레인 선교사는 학교 이름에 ‘맥켄지’를 덧붙이고, 교수진을 꾸려 ‘맥켄지 대학(Mackenzie College)’을 설립하였습니다. 이것이 ‘맥켄지 미국학교 및 장로교 대학교(Escola Americana e Universidade Presbiteriana Mackenzie)’입니다. 이 종합학교는 1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이지에노뽈리스에 위치해 있습니다.
미션 스쿨인 맥켄지에 세워진 첫 건물의 머릿돌에는 다음과 같은 성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딤전 1:17).”
침례교회 선교
미국 북장로교회가 파송한 첫 선교사가 아직 브라질에 도착하기 몇 달 전인 1859년 3월 30일, 토머스 제퍼슨 바우엔(Thomas Jefferson Bowen) 선교사가 가족과 함께 히오 지 쟈네이로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들은 미국에서 아프리카 서부에서 노예로 잡혀온 흑인 부족인 요루바(Ioruba) 족을 대상으로 사역을 한 경험이 있어서 요루바 어를 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브라질에서도 요루바 족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흑인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언어로 선교사역을 하는 것이 브라질 당국의 의심을 불러일으키게 되어, 바우엔 선교사 부부는 구속되기도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