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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용주 목사의 역사탐방)브라질 개신교회 역사 13

2022.04.21 10:00 입력 | 조회수 : 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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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용주 목사(봉헤치로 제일교회 담임)
 
앙리빌 함락
 멩 지 싸 총독은 1560년의 콜리니 요새 함락과 1565년 히오 지 쟈네이로 시 건설 소식을 담은 보고서를 포르투갈 왕실로 보냈습니다. 이 때 자신의 조카 에스따씨오 지 싸(Estácio de Sá)에게 이 서한을 맡겼습니다. 총독의 보고서를 제출하고 브라질로 귀한하기 전, 포르투갈 왕실의 섭정인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 왕비 까따리나 다 아우스티리아(Catarina da Áustria)는 그를 브라질 총사령관에 임명하였습니다. 
 1565년 1월, 브라질로 돌아온 그는 내륙에 정박 중이던 프랑스 군함을 공격함으로 앙리빌에 대한 전쟁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지난 7년간 착실하게 전쟁을 준비해온 프랑스인들과 따모이오 족은 한 달에 한 번 정도의 산발적 습격을 가해 포르투갈 군에게 크고 작은 손실을 입혔습니다. 그 중에는 히오 지 쟈네이로 시의 성벽을 거의 다 무너뜨릴 정도의 공격도 있었습니다. 그러자 사기가 저하된 포르투갈 군은 ‘총사령관 직속 군단’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초반의 공세를 버리고 점점 방어를 굳혀가게 되었습니다. 
 포르투갈의 방어태세는 개신교인들과 따모이오 족이 포르투갈 군에 대한 치밀한 공격계획을 짤 시간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듬해인 1566년 7월 13일, 프런씨스꼬 벨료(Francisco Velho) 함장이 이끄는 포르투갈 병사 몇 명이 과나바라 쪽으로 와서 벌목을 할 것이라는 첩보를 입수한 프랑스인들과 따모이오 족 추장인 과이샤라(Guaixará)는 180척의 협선을 과나바라 만 한쪽에 매복시켜 두고, 다른 수십 대의 협선을 뻥 지 아쑤가르 쪽으로 보내 무력시위를 하는 동시에 프런씨스꼬 벨료의 배를 공격하게 하였습니다. 이에 도시 쪽에서 총사령관 에스따씨오 지 싸가 함선 네 척을 이끌고 응전하려 나오자 따모이오 족은 도망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거짓 후퇴에 속은 포르투갈 군이 인디오들을 과나바라 쪽 깊숙이까지 추격하여 들어가자, 매복하고 있던 180척의 협선이 쏟아져 나오면서 측면과 후면을 에워싸 포르투갈 군을 완전히 포위하고 화포와 화살을 비 오듯이 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 한 포르투갈 병사가 쏜 소포가 따모이오 족 협선의 화약을 맞추면서 인디오 함대에 연쇄폭발을 일으켰고, 이에 놀란 따모이오 족은 후퇴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날 포르투갈 측은 막심한 병력 손실을 입게 되었습니다. 이듬해가 되기까지 앙리빌을 공격할 생각을 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듬해인 1567년 1월 20일, 지난 6개월동안 부지런히 병력을 증강한 포르투갈은 총독이 친히 군대를 지휘하는 가운데 육지(플라멩고 해변)와 바다(싼따 끄루즈 섬) 양쪽에서 앙리빌을 공격해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더 이상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프랑스인들 약 120명과 따모이오 족 전사들은 앙리빌 요새를 탈출하여 북서쪽으로 도망하였습니다. 이들은 포르투갈 군의 추격을 받았는데, 오늘날의 미나스 졔라이스(Minas Gerais) 주의 남부에 도착하자, 그제서야 추격이 멈췄습니다. 
 프랑스의 브라질 식민지 건설실패
 이렇게 해서, 빌가뇽의 야심과 프랑스 왕실의 신대륙 무역에 대한 갈망, 그리고 칼빈과 제네바 공화국의 선교 열정이 한데 얽혀 세워진 신대륙 최초의 개신교 식민지 ‘프랑스령 남미’는 사라졌습니다. 어쩌면 애초에 이러한 모순 위에 세워진 선교 식민지였기에 10년이라는 짧은 기간이 허락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후 새로운 개신교 선교지가 세워지기까지 브라질은 60년을 기다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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