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성복 목사
지금은 확실히 우리에게 고난의 시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고통의 시간을 가질 때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출애굽기 2장 2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 된 지라.”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으면 우리 하나님께 탄식하면서 부르짖었을까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탄식은 습관이 되어 버렸습니다.
출애굽 시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며 그 과정인 광야의 길을 갈 때 하나님은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에게 없는 것만 바라보면서 모세를 향하여 그리고 하나님을 향하여도 원망하였습니다.
계속해서 원망이 가득합니다. 저 앞에 있는 가나안 땅은 생각지도 않습니다. 그저 지금 여기 이곳에서 불편하니까 부족하니까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였습니다. 한번은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라고 원망을 하였습니다. 이럴 때 모세는 말합니다. 출애굽기 16장 8절입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가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
그런데 이 원망이 하나님 들으시기에 불편하였으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반응하셨습니다. 민수기 14장 27~28절입니다.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그동안에는 원망하는 것을 듣고 그때마다 해결하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들이 내 귀에 들린 대로 하나님께서 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슨 말을 들었을까요?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죽었으면 좋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말한 대로 내가 그들에게 행하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모세와 아론, 그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죽었으면 좋았겠다고 말한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말한 대로 행하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깊이 생각해 볼 문제가 있습니다. 고통과 고난이라는 문제입니다. 고통과 고난은 언제 어디서나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만 받은 것이 아닙니다. 너도 받으며 나도 받고 있습니다. 모두가 고난 속에 살았던 경험이 있고 지금도 그 고난 속에 헤매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고난은 자기 자신 때문에 받는 고난입니다. 조금 더 범위를 넓힌다면 가족들 때문입니다. 공동체를 위한 고난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것은 어느 정도 제한된 대상을 위한 고난이라는 말입니다. 이것 때문에 원망하기도 합니다. 탄식합니다. 울부짖습니다.
그런데 온 세상의 모든 사람을 위한 고통과 고난을 받으신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원망 한마디 안 하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임마누엘로 오셨습니다. 그 임무를 다하시고 결국에는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고통과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 고난의 시간과 장소를 향하여 뚜벅뚜벅 걸어가시는 예수님이셨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면 죽임당하게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누가복음 18장 31~3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고통과 고난을 받을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왜요? 그 고난 뒤에 삼 일 만에 부활한다는 것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담대하게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고난 속에서 부활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고난이라는 십자가가 없었다면 부활의 영광도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 중에 가장 큰 고통과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인하여 이루 말할 수 없는 심한 고통이고 고난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예수님이 고난 뒤에 부활이 있었다는 사실을 믿어 담대하게 길을 간 것처럼, 아니 그 고난의 십자가 뒤에 부활의 영광을 맞이한 것을 우리가 알고 믿을진대 우리도 이 고난의 뒤에는 부활의 영광이 있다는 사실을 믿고 담대하게 걸어가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처럼 불평이나 원망하지 말고 소망을 갖고 걸어갑시다. 원망하면 원망한 대로 우리의 길이 열릴 것입니다. 그러니 잠시 후에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고 힘을 냅시다.
특히 지금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고난받으신 고난 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 주간 뒤에 부활주일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런 과정이 저와 여러분에게도 있다는 사실을 믿고 지금 큰 고통과 고난이 있어도 조금 더 힘을 내서 우리의 길을 담대하게 걸어갑시다. 임마누엘 되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오늘도 저와 여러분과 동행하여 주십니다. 그 부활의 주님이 새로운 소망을 심어 주시기를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YouTube : 강성복목사 TV)

강성복 목사
지금은 확실히 우리에게 고난의 시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고통의 시간을 가질 때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출애굽기 2장 2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 된 지라.”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으면 우리 하나님께 탄식하면서 부르짖었을까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탄식은 습관이 되어 버렸습니다.
출애굽 시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며 그 과정인 광야의 길을 갈 때 하나님은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에게 없는 것만 바라보면서 모세를 향하여 그리고 하나님을 향하여도 원망하였습니다.
계속해서 원망이 가득합니다. 저 앞에 있는 가나안 땅은 생각지도 않습니다. 그저 지금 여기 이곳에서 불편하니까 부족하니까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였습니다. 한번은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라고 원망을 하였습니다. 이럴 때 모세는 말합니다. 출애굽기 16장 8절입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가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
그런데 이 원망이 하나님 들으시기에 불편하였으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반응하셨습니다. 민수기 14장 27~28절입니다.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그동안에는 원망하는 것을 듣고 그때마다 해결하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들이 내 귀에 들린 대로 하나님께서 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슨 말을 들었을까요?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죽었으면 좋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말한 대로 내가 그들에게 행하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모세와 아론, 그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죽었으면 좋았겠다고 말한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말한 대로 행하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깊이 생각해 볼 문제가 있습니다. 고통과 고난이라는 문제입니다. 고통과 고난은 언제 어디서나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만 받은 것이 아닙니다. 너도 받으며 나도 받고 있습니다. 모두가 고난 속에 살았던 경험이 있고 지금도 그 고난 속에 헤매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고난은 자기 자신 때문에 받는 고난입니다. 조금 더 범위를 넓힌다면 가족들 때문입니다. 공동체를 위한 고난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것은 어느 정도 제한된 대상을 위한 고난이라는 말입니다. 이것 때문에 원망하기도 합니다. 탄식합니다. 울부짖습니다.
그런데 온 세상의 모든 사람을 위한 고통과 고난을 받으신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원망 한마디 안 하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임마누엘로 오셨습니다. 그 임무를 다하시고 결국에는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고통과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 고난의 시간과 장소를 향하여 뚜벅뚜벅 걸어가시는 예수님이셨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면 죽임당하게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누가복음 18장 31~3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고통과 고난을 받을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왜요? 그 고난 뒤에 삼 일 만에 부활한다는 것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담대하게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고난 속에서 부활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고난이라는 십자가가 없었다면 부활의 영광도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 중에 가장 큰 고통과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인하여 이루 말할 수 없는 심한 고통이고 고난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예수님이 고난 뒤에 부활이 있었다는 사실을 믿어 담대하게 길을 간 것처럼, 아니 그 고난의 십자가 뒤에 부활의 영광을 맞이한 것을 우리가 알고 믿을진대 우리도 이 고난의 뒤에는 부활의 영광이 있다는 사실을 믿고 담대하게 걸어가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처럼 불평이나 원망하지 말고 소망을 갖고 걸어갑시다. 원망하면 원망한 대로 우리의 길이 열릴 것입니다. 그러니 잠시 후에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고 힘을 냅시다.
특히 지금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고난받으신 고난 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 주간 뒤에 부활주일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런 과정이 저와 여러분에게도 있다는 사실을 믿고 지금 큰 고통과 고난이 있어도 조금 더 힘을 내서 우리의 길을 담대하게 걸어갑시다. 임마누엘 되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오늘도 저와 여러분과 동행하여 주십니다. 그 부활의 주님이 새로운 소망을 심어 주시기를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YouTube : 강성복목사 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