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로그인

(기독교 문학 산책)유스티누스 삶

2021.01.15 11:46 입력 | 조회수 : 912

트위터로 기사전송 페이스북으로 기사전송 구글+로 기사전송 밴드공유 C로그로 기사전송

크게보기 스크랩하기


강태광목사.jpg
강태광 목사(World Share USA)  
 
 우리에겐 영어명 “순교자 저스틴”으로 알려진 기독교 변증가 유스티누스에 대해 살펴봅니다. 유스티누스는 많은 글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현재까지 남아 있는 자료는 “제 1변증서”, “제 2 변증서”, “유대인 트리포와의 대화”입니다. 그중 “제 1, 2 변증서”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유스티누스는 그리스 철학의 로고스를 그리스도교적으로 설명한 최초의 그리스도교 철학자입니다. 그는 그리스의 우주적 로고스를 그리스도에 연계시키는 아주 독창적인 사상가였습니다. 또한 그는 스스로를 철학자라고 주장하면서 철학자들이 입는 외투(pallium)를 걸치고 순회 설교자가 되어 돌아다니면서 기독교 진리를 강론했습니다. 
 
 저스틴의 주장과 이론들은 후대 그리스도교 변증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예컨대, 아테나고라스(Athenagoras), 테오필루스(Theophilus), 터툴리안(Tertullian), 펠릭스(Minucius Felix)등입니다. 그들의 신학과 기독교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입니다. 
 또한 유스티누스는 이단들과의 논쟁을 했습니다. 이단에 대한 단호한 그의 자세는 영지주의(Gnosticism)와 군주신론(Monarchianism), 그리고 오리겐주의(Origenism) 등과 맞섰던 헤게시푸스(Hegesippus), 이레나이우스(Irenaeus), 히폴리투스(Hippolytus), 그리고 에피파니우스(Epiphanius)에게로 이어집니다.
 
 유스티누스는 요한복음 4장에 수가성 여인의 이야기가 나오는 사마리아의 수가성 인근에서 살았던 그리스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로마 시민권을 가진 유스티누스는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익숙한 고전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식지 않는 진리에 대한 갈증은 당시 주류였던 철학과 사상들을 다양하게 익히도록 하였습니다. 구체적으로 그는 스토아주의(Stoicism), 소요학파(Peripateticism), 피타고라스학파(Pythagoreanism), 그리고 플라톤주의(Platonism)를 섭렵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 중 어떤 것도 유스티누스의 심적 갈증을 해갈시켜주지 못했습니다. 각 분야의 학문들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즉, 스토아 철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보호하셨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관련하여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추종하는 자들은 진리를 가르치는 것보다 등록금을 받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피타고라스 철학자들은 음악, 수학, 그리고 기하학에 보다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영적 갈증과 목마름을 해소하지 못한 유스티누스는 방황하게 됩니다.  
 
 진리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들을 추구하는 이런 철학들에 대한 공허함을 가진 유스티누스는 132년 바닷가를 거닐다가 어느 날 한 노인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노인은 유스티누스가 이전에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깨우쳐 줍니다. 즉 철학의 무능력에 대해 알려 주었습니다. 그 노인은 플라톤의 생각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정확하게 알려주었습니다. 그 노인은 철학자들 또한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않은 이성을 통해 완전한 영적 진리에 이를 수 없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았던 이스라엘의 고대 선지자들에 대해 알려줬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예언했습니다. 유스티누스는 그 대화후에 바로 기독교로 개종하였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유스티누스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이후에도 자신은 철학자라고 자처하며 살았습니다. AD150년경에 기독교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로마에 도착했을 때 그는 로마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논쟁거리였고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유스티누스의 글들을 보면 과거 자신이 플라톤 철학자임을 내세웠던 것처럼 스스로 그리스도교 철학자 혹은 그리스도교에 관한 철학자임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여러 면에서 그리스도교와 그리스(헬라) 철학은 서로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그리스도 이전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했으며, 나중에 살펴볼 테르툴리아누스(터툴리안)가 “아테네와 예루살렘은 무슨 관계가 있는가?”라는 말을 한 것이 유스티누스적인 태도를 겨냥한 말일지도 모릅니다.
 유스티누스의 저서 중 일부는 유실되었습니다. 그러나 짧지만 중요한 변증적 저서 세편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습니다. 유스티누스의 “제 1 변증서”는 아마 155년에 순교한 폴리갑 감독의 사건에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거기서 유스티누스는 당시 로마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에게 담대하고 강경한 어조로 그리스도인들을 보다 공정하게 대우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받고 있는 상황으로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재판의 과정도 없이 즉결 처결해 버리는 것에 대해 강하게 항변합니다. 그의 어조는 아주 강합니다. “만일 우리가 악한자로 유죄 선고를 받지 않았다면, 혹은 사악한 죄가 입증되지 않는 한, 우리는 어떠한 부당한 학대도 받을 이유가 없다. 그러나 당신이 우리를 죽일 수 있다 해도 우리를 해치지는 말아주시오”라고 요청하면서 황제를 직접 방문하여 그리스도인을 합법적인 죄명을 밝히지 않고 즉결 처리하는 박해의 법령을 바꿔줄 것을 간청하기도 하였습니다. 폴리갑 감독이 화형을 당하고 난 후에 쓴 글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강한 어조입니다.    
 
 유스티누스는 162년 로마 권력자들에 의해 로마에서 사형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형 이유는 아직까지도 알려지지 않습니다. 그의 “변증서”에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미리 암시해 둔 대목이 있습니다. 그는 로마의 당국자들에게 끊임없이 그리스도교를 변호하고 항변하는 공개서한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서한들을 로마 황제와 당직자들이 읽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런 태도는 그리스도 복음을 당당하게 변증해야 함을 천명하는 것이었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공감과 지지를 얻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모습을 보며 진리를 변증함에 있어서 당당한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는 사실에 깊은 공감을 했던 것입니다.
"남미복음신문" 브라질 유일 한인 기독교 신문(nammicj.net) - copyright ⓒ 남미복음신문. 무단전재 & 재배포 금지
댓글

전체 뉴스목록

맨위로

PC버전 보기 로그인 MY스크랩

Copyright ⓒ Netfu Co.Ltd.,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