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둑질도 하지 않았는데, 왜 내가 죄인인가요.” 기독교를 처음 접한 사람들이 가장 의아하게 생각하고 던지는 질문이다. 기독교 신학은 이와 같은 질문에 대답할 의무가 있다. 왜냐하면, 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있어야만 그리스도를 통한 참다운 구원의 기쁨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죄란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형법적 의미를 포괄한다. 포괄한다는 것은 죄의 본질이 비도덕적 행위라는 현상을 포함한다는 의미다. 잘못된 행위는 분명 기독교적 의미에서도 죄다. 그러나 기독교는 비도덕적 행위의 근원에 죄의 본질이 놓여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어떻게 할 것인가.
환원신학은 죄의 기원을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해서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시작됐다고 고백한다. 그렇다면 죄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불순종의 결과로 인간은 뱀과 원수가 됐고, 해산의 고통이 생겼으며, 땅의 저주를 받아서 땀을 흘려야 했다. 그리고 종국에는 에덴에서 추방됐고 흙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이 순간부터 인간의 본분이 하나님과 사귐임을 잊게 됐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게 됐다.
죄에 관한 또 다른 문제가 있다. 바로 ‘죄의 전가’이다. 마치 죄가 유전처럼 아담의 후손에게 전해지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환원신학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원리를 제시한다.
아담은 자연적 의미와 언약적 의미에서 인류를 대표한다. 아담은 인류의 육체적 선조이며, 하나님과 인간이 맺은 언약에서 인류를 대표한다.(고전 15:22, 45~49) 그래서 아담은 후대에게 죄책과 전인적 부패인 오염을 전한다. 이것이 원죄다. 그러나 죄에는 원죄 때문에 인간 개인이 스스로 범하는 죄인 ‘자범죄’도 있다. 자범죄는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범하게 되며, 인간 자신의 의지로 짓는 죄이다.
결국, 이와 같은 죄는 공의의 하나님의 측면에서 반드시 형벌과 징계를 받아야만 한다. 형벌은 범죄자를 향한 하나님의 공의의 발동이며, 징계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성도들이 연약해 범죄의 자리에 떨어졌을 때 하나님께서 가하시는 채찍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죄인이다. 자신이 원하든 혹은 원하지 않든 죄의 상태에서 태어나고 자란다. 얼마나 비련한 존재인가. 어떻게 이와 같은 죄의 구렁텅이에서 인간 스스로는 어떠한 구원도 기대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구원받은 자라 고백하며 기쁨의 삶을 누린다. 전혀 구원의 빛을 갈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느 순간에 우리는 구원받은 자로서 당당하게 살아간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건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바로 죄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다.(마 1:21, 계 21:27) 그래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적인 사망과 육적인 사망, 그리고 죽음 이후에 당하는 영원한 사망에서 구원 받았다.(엡 2:1, 눅 9:69, 히 9:27 등)
사람들이 흔히 묻고 논쟁하는 주제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건은 과거에 있었는데,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영향을 끼치느냐는 것이다. 환원신학은 이에 대해 성경을 토대로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구원이란 과거에 얻은 구원도 있고, 현재에 얻는 구원이 있으며, 미래에 얻을 구원이 있다.” 즉, 과거의 구원은 이미 성취된 구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단 한 번 그러나 영원히’ 이뤄주신 구원사건이다.
그러나 중생한 성도는 구원을 이뤄가는 과정에 있다. 죄의 지배로부터 죄를 극복해가는 여정에 있다. 이를 성화라 부른다. 중요한 것은 성화란 인간의 의지나 내면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이를 통해 성도는 현재에 구원의 기쁨을 맛보며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
미래에 이뤄질 구원은 인간 역사의 종말이 오고,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던 사람이 부활하고, 그때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이 변화해 영원한 부활의 생명을 얻는 것이다.
그리스도의교회는 성경이 증거하는 인간의 죄와 구원을 고백한다. 죄인이라는 말은 인간의 존엄성을 깎아내리는 표현이 아니다. 죄인이라는 교리는 인간의 현상태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도구이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맺기 위한 인간의 자각이다. 스스로가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인간의 현상태를 깨닫는 사람만이 외부에서 오는 은총의 구원을 기대하게 된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을 통해 값없이 주어지며, 이를 자신을 위한 기쁨의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 그렇기에 올바른 구원이란 죄와 죄의 결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고백하며 받아들이는 것밖에 없다.
서울기독대학교
이강평 총장

“도둑질도 하지 않았는데, 왜 내가 죄인인가요.” 기독교를 처음 접한 사람들이 가장 의아하게 생각하고 던지는 질문이다. 기독교 신학은 이와 같은 질문에 대답할 의무가 있다. 왜냐하면, 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있어야만 그리스도를 통한 참다운 구원의 기쁨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죄란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형법적 의미를 포괄한다. 포괄한다는 것은 죄의 본질이 비도덕적 행위라는 현상을 포함한다는 의미다. 잘못된 행위는 분명 기독교적 의미에서도 죄다. 그러나 기독교는 비도덕적 행위의 근원에 죄의 본질이 놓여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어떻게 할 것인가.
환원신학은 죄의 기원을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해서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시작됐다고 고백한다. 그렇다면 죄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불순종의 결과로 인간은 뱀과 원수가 됐고, 해산의 고통이 생겼으며, 땅의 저주를 받아서 땀을 흘려야 했다. 그리고 종국에는 에덴에서 추방됐고 흙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이 순간부터 인간의 본분이 하나님과 사귐임을 잊게 됐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게 됐다.
죄에 관한 또 다른 문제가 있다. 바로 ‘죄의 전가’이다. 마치 죄가 유전처럼 아담의 후손에게 전해지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환원신학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원리를 제시한다.
아담은 자연적 의미와 언약적 의미에서 인류를 대표한다. 아담은 인류의 육체적 선조이며, 하나님과 인간이 맺은 언약에서 인류를 대표한다.(고전 15:22, 45~49) 그래서 아담은 후대에게 죄책과 전인적 부패인 오염을 전한다. 이것이 원죄다. 그러나 죄에는 원죄 때문에 인간 개인이 스스로 범하는 죄인 ‘자범죄’도 있다. 자범죄는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범하게 되며, 인간 자신의 의지로 짓는 죄이다.
결국, 이와 같은 죄는 공의의 하나님의 측면에서 반드시 형벌과 징계를 받아야만 한다. 형벌은 범죄자를 향한 하나님의 공의의 발동이며, 징계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성도들이 연약해 범죄의 자리에 떨어졌을 때 하나님께서 가하시는 채찍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죄인이다. 자신이 원하든 혹은 원하지 않든 죄의 상태에서 태어나고 자란다. 얼마나 비련한 존재인가. 어떻게 이와 같은 죄의 구렁텅이에서 인간 스스로는 어떠한 구원도 기대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구원받은 자라 고백하며 기쁨의 삶을 누린다. 전혀 구원의 빛을 갈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느 순간에 우리는 구원받은 자로서 당당하게 살아간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건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바로 죄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다.(마 1:21, 계 21:27) 그래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적인 사망과 육적인 사망, 그리고 죽음 이후에 당하는 영원한 사망에서 구원 받았다.(엡 2:1, 눅 9:69, 히 9:27 등)
사람들이 흔히 묻고 논쟁하는 주제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건은 과거에 있었는데,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영향을 끼치느냐는 것이다. 환원신학은 이에 대해 성경을 토대로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구원이란 과거에 얻은 구원도 있고, 현재에 얻는 구원이 있으며, 미래에 얻을 구원이 있다.” 즉, 과거의 구원은 이미 성취된 구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단 한 번 그러나 영원히’ 이뤄주신 구원사건이다.
그러나 중생한 성도는 구원을 이뤄가는 과정에 있다. 죄의 지배로부터 죄를 극복해가는 여정에 있다. 이를 성화라 부른다. 중요한 것은 성화란 인간의 의지나 내면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이를 통해 성도는 현재에 구원의 기쁨을 맛보며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
미래에 이뤄질 구원은 인간 역사의 종말이 오고,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던 사람이 부활하고, 그때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이 변화해 영원한 부활의 생명을 얻는 것이다.
그리스도의교회는 성경이 증거하는 인간의 죄와 구원을 고백한다. 죄인이라는 말은 인간의 존엄성을 깎아내리는 표현이 아니다. 죄인이라는 교리는 인간의 현상태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도구이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맺기 위한 인간의 자각이다. 스스로가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인간의 현상태를 깨닫는 사람만이 외부에서 오는 은총의 구원을 기대하게 된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을 통해 값없이 주어지며, 이를 자신을 위한 기쁨의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 그렇기에 올바른 구원이란 죄와 죄의 결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고백하며 받아들이는 것밖에 없다.
서울기독대학교
이강평 총장